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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칼럼]증세·감세,제대로 붙어보자



세금은 민감한 사안이다. 유권자들의 지갑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선거에서도 세금보다 더 파괴력 있는 정책 대결을 찾기 힘들다.

미국의 예를 보자. 지난 84년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는 유권자들에게 증세의 불가피성을 호소했다. 꼼꼼하게 그래프 차트까지 들고 나온 먼데일 후보는 재정 적자를 줄여 성장동력을 확충하려면 세금을 더 거둘 수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재선을 노리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반대 정책을 고수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감세를 통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게 이른바 레이거노믹스의 핵심이었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와 함께 레이건 대통령은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신봉자였다.

경제 살리기라는 같은 목표를 놓고 한쪽은 증세, 다른 한쪽은 감세 처방을 내린 뒤 유권자들의 심판을 기다렸다. 결과는? 레이건 대통령이 먼데일 후보에게 압승을 거뒀다.

레이건의 뒤를 이어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직에 도전했다. 88년 공화당 후보 수락연설에서 그는 “내 입술을 읽어라. 세금 신설은 없다(Read my lips. No new taxes.)”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걸었고 무난히 당선했다.

그렇다고 감세 후보가 늘 이긴 것은 아니다.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는 증세 공약을 내걸고도 아버지 부시의 재선을 막았다. “세금 신설은 없다”는 슬로건이 문제였다. 일의 전말은 이렇다.

부시가 대통령일 때 미국 경제는 침체의 골이 더 깊어지면서 재정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출을 줄이려면 의료·사회보장비까지 깎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저소득·노인층의 지지를 받는 민주당은 증세 없는 지출 삭감에 결사 반대했다. 당시 의회는 민주당이 장악한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어쩔 수 없이 증세에 동의했다. 다음날 뉴욕포스트지는 이런 제목을 달았다. “내 입술을 읽어라. 나는 거짓말을 했다(Read my lips. I lied.).”

영악한 클린턴 후보가 이를 놓칠 리 없다.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또 다른 유명한 슬로건이 여기서 탄생했다. 부시는 자기가 친 감세의 덫에 스스로 걸려든 셈이다.

클린턴은 취임 첫해(93년) 부자들을 겨냥한 소득세율 인상을 단행했다. 결과적으로 미국 경제는 클린턴 통치 8년 간 건국 이래 최대 호황을 누렸다. 호황의 씨앗을 레이건이 뿌렸다는 반론도 있으나 막대한 재정 적자를 흑자로 돌린 클린턴의 업적만은 인정해야 한다.

증세가 기를 편 것도 잠시, 레이건을 가장 존경한다는 아들 부시 대통령은 다시 감세로 돌아섰다. 부자에게만 혜택이 돌아간다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나친 감세 탓일까, 미국 경제는 다시 사상최대 규모의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올 들어 달러화가 추세적 약세를 보이는 것도 적자 악화가 근본 원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연설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촉구하고 나섰다. 딱 부러지게 말한 건 아니지만 증세를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번 기회에 우리 선거에서도 세금을 놓고 본격적인 정책 대결의 장이 펼쳐졌으면 좋겠다.

먼저 노대통령은 증세가 불가피하면 그렇다고 ‘화끈하게’ 말해주길 바란다. 오늘(25일) 열리는 신년 기자회견이 좋은 기회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오는 5월 말 지방선거 전에 당 차원에서 명확한 세금 정책을 밝혀야 한다. 우리당은 정말 국가대계를 위해 증세를 추진할 각오가 서 있는지, 한나라당은 과연 부자만을 위한 정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감세를 초지일관 밀고 나갈 것인지 궁금하다.

판단은 유권자의 몫이다. 부자와 기업을 좀 괴롭히더라도 분배와 복지가 시급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증세당(黨)을 지지할 것이다. 거꾸로 세율 인하를 통한 성장우선 정책이 결국 복지를 확대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감세당에 표를 던질 것이다.


세금 논쟁은 내년 대선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 틀림없다. 국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가진 후보라면 표를 잃을까 두려워 두루뭉술한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제 집권을 꿈꾸는 후보는 각자 요리한 ‘세금 메뉴’를 내놓고 유권자들의 냉엄한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 paulk@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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