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곽인찬칼럼]“내(통계) 말 좀 들어보세요”/곽인찬 논설위원



내 이름은 통계. 요즘 나를 두고 말이 많다. 위로는 대통령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낱 숫자에 불과한 나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참 면구스럽다. 원래 조용히 있어야 하는 법인데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 국정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양극화 탓이 크다. 우리 사회를 2대 8로 갈라서 설명하는 논리가 유행하면서 양극화가 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 그러자 뒤늦게 이를 뒷받침하는 갖가지 통계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사회 각 분야마다 양극화가 이렇게 심각한 줄은 통계인 나도 미처 몰랐을 정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싼 논란 과정에서 내 치부가 드러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청와대 출신의 한 보좌관은 정부의 낙관적인 전망에 대해 “장난 수준의 통계 조작”이라고 일축했다. 통계를 살짝 ‘마사지’했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내가 종종 마사지를 받는다는 걸 그 전직 보좌관은 어떻게 알았을까.

일찍이 내 실체를 파악한 통계학자가 있었다. 대헐 허프라는 이 미국인은 ‘새빨간 거짓말, 통계(How to Lie with Statistics)’라는 책을 써서 사람들에게 통계의 허구성을 경고한 바 있다. 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통계학이라는 비밀스러운 술어는 증거를 중요시하는 문화를 가진 현세에서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혼란에 빠뜨리게 하며 사물을 과장하거나 극도로 단순화하기 위해 자주 이용된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과 스페인이 싸운 전쟁(1898년)에서 미 해군의 전사율은 1000명당 9명이었다. 같은 기간 뉴욕시의 사망률은 이보다 많은 16명이었다. 해군 징병관들은 이 숫자를 들이대며 해군 입대가 뉴욕에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선전했다. 맞는 주장인가 틀린 주장인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엉터리 주장이다. 애당초 두 집단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제대로 비교하려면 모집단의 연령층을 맞춰야 한다. 즉 해군 장병들과 같은 또래의 뉴욕 청년들을 비교해야 한다. 뉴욕 시민 중 사망률이 높은 갓난아이·노인·환자를 빼야 한다는 말이다.

허프는 통계적 조작에 의해 몇 번이나 걸른 자료에 소수점이나 백분율(%)이 붙으면 사람들은 이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부끄럽지만 내 본질을 꿰뚫은 경구(警句)가 아닐 수 없다. 천만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소수점과 퍼센트 앞에서 맥을 못춘다는 점이다. 나를 마치 신앙의 대상인양 떠받드는 경향도 여전하다. 내가 이 재미에 산다.

급기야 나를 둘러싼 논란에 우리 본가(本家)도 뛰어들었다. 통계청은 나를 더 띄우기 위해 산업활동동향 등 주요 지표의 발표 시간을 오전에서 오후로 바꿨다. 그래야 내가 조간신문에서 더 크게 다뤄진다는 것이다. 오후 1시30분에 발표한다니 그 때는 증시와 외환시장이 한창 정신없이 돌아갈 때가 아닌가. 그 시간에 통계가 발표되면 혼란이 클 텐데 어쩌자고 본가에서 그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본가도 정신이 없다. 주요 간부들이 줄줄이 나서서 내 중요성을 옹호하느라 열심이다. 통계법도 개정하겠단다. 본가에서 나를 이토록 끔찍이 아껴준 전례가 없다.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전투적, 정치적이 됐다.


본심을 말하자면 나는 공평무사, 남의 구설에 오르지 않고 조용히 살고 싶을 뿐이다. 편을 가르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일은 내 존재 이유가 아니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다투는 일이 잦아졌지만 따지고 보면 나한테 문제가 있기보다는 나를 제멋대로 해석하려는 사람들한테 더 큰 문제가 있다고 감히 주장한다. 그러니 특히 정치인과 관료 여러분, 제발 날 좀 조용히 내버려두면 안 되겠니.

/ paulk@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