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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칼럼] ‘틀’을 잡아야 이긴다는데…



미국 버클리대의 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선거를 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말이 곧 선거를 쥐락펴락한다는 게 그의 믿음이다.

말은 틀(Frame)을 결정한다. 틀은 뭔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창, 가치관이다. 일단 이 틀이 형성되면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그 틀을 바꾸지 않는다고 레이코프는 말한다. 진실조차도 틀에 맞지 않으면 버림받기 일쑤다. 진실을 토대로 틀을 짜는 게 아니라 틀에 맞춰 진실을 취사 선택한다는 얘기다. ‘로마인 이야기’에서 인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시오노 나나미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말한다. 레이코프가 이 말을 들었다면 무릎을 쳤을 것이다.

열혈 진보파인 레이코프는 틀에 관한 한 공화당(코끼리)이 민주당(당나귀)을 압도한다고 개탄한다. 그 선봉에는 헤리티지재단 등 싱크탱크들이 있다. 80년대 이래 미국 대통령은 레이건-아버지 부시-클린턴-아들 부시로 이어진다. 클린턴만 빼면 모두 공화당 출신이다.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 빠진 아들 부시마저 당당히 재선에 성공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공화당이 틀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공화당은 세금 정책을 말할 때 한결같이 택스 릴리프(Tax Relief)라는 단어를 쓴다. 사람들은 릴리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치 구원투수가 나타난 것처럼 안도한다. 공화당은 상속세(Estate Tax)도 사망세(Death Tax)로 바꿔 부른다. 단어 하나 바꿨을 뿐인데 사망세라니까 죽을 때도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게 섬뜩하게 느껴진다.

사실 증세는 저소득층의 지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가난뱅이 중에도 공화당 지지자가 많다. 왜? 그들은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공화당적 가치의 틀 안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진실은 뒷전이다. 민주당이 숫자와 그래프를 들이대며 논리적으로 설명해봤자 먹히질 않는다. 유권자의 경제적 이해관계는 세상을 보는 틀, 즉 그의 가치관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게 레이코프의 탄식이다.

낙태와 동성애를 다루는 공화당의 전략도 틀을 장악하려는 시도다. 낙태·동성애는 생명·가족(Family)을 유난히 강조하는 미국적 가치와 충돌한다. 민주당은 낙태와 동성애를 폭넓게 허용하자는 쪽이다. 평균적인 미국인에게 뭔가 삐딱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국방도 다를 게 없다. 부시는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대량살상무기는 찾지 못했다. 알 카에다와 아무 상관없는 사담 후세인만 애꿎은 희생양이 됐다. 진실을 말하자면 부시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강한 국방력과 애국심은 성역이 됐다. 이걸 건드리면 반미국적이다. 레이코프는 말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리라(Truth will not set you free).”

유권자의 틀을 선점하는 정치공학 게임에서 공화당은 고수, 민주당은 하수다. 하수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기껏해야 고수가 내놓은 가치를 반박할 뿐이다. 그래봤자 코끼리 손바닥 안이다.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당나귀는 당나귀만의 틀로 유권자들을 설득해야 정권을 잡을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러나 어쩌랴, 레이코프 또한 역설의 함정에 빠져 있으니. 그가 코끼리를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새삼 코끼리의 존재가 떠오른다. 한번 형성된 틀은 이렇게 무섭다.


5개월가량 남은 우리 대선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 한쪽은 얼굴 붉히며 검증 공방이 한창이고 다른 한쪽은 사분오열 속에 후보가 난립해 있다. 한쪽은 자기학대, 다른 한쪽은 자기포기 증세를 보이고 있다. 틀이 어쩌니저쩌니 따지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