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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칼럼] 중국 때리기,한국 때리기/곽인찬 논설실장

환율전쟁의 자욱한 포연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기사가 있다. 호주달러(AUD)의 가치가 미국달러(USD)와 1대 1로 맞먹게 됐다는 것이다. 2년 전 이맘 때 1AUD는 0.6USD 수준이었으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미국달러의 가치 추락은 '자작극'이다. 미국은 경기를 살리기 위해 쉴 새 없이 돈을 찍어내는 양적완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돈도 상품이다. 너무 흔하면 값어치가 떨어지고 귀하면 오르게 돼 있다. 이걸 모를 리 없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달러 폭탄을 마구 투하하고 있으니 대단한 배짱이다. 그 뒷감당을 어쩌려고 저러나.

전후 브레턴우즈 체제는 금 본위제를 기초로 했다. 국제 교역은 미국달러로 결제하되 FRB는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는 다른 나라의 요구에 응할 수 있을 만큼 금을 쌓아야 했다. 이걸 19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이 무너뜨렸다. 이른바 금태환 정지 선언이다. 금으로 안 바꿔 준다는데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계 경제력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슈퍼 경제대국 미국을 대신할 나라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은 기축통화국의 특권인 동시에 독단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자기 나라 화폐를 그렇게 양껏 찍어내지 못한다. 그 배경엔 미국 경제가 무너지면 세계 경제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대마불사론'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너무 흔해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지폐는 종잇장으로 전락한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이 좋은 예다. 미국이 발권력 남용으로 '달러제국'의 위상을 스스로 허물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잎 하나를 보면 가을이 왔음을 안다고 했던가(一葉知秋), 호주달러를 보면 미국 경제의 앞날을 점칠 수 있다.

아직은 미국달러가 우대받는 세상이지만 어느 순간 수출입 업자들은 달러 대신 유로나 위안, 혹은 자국 통화 결제로 휙 돌아설지 모른다. 더불어 중국을 비롯해 미 국채(TB)에 투자한 외국인 투자가들은 서둘러 TB를 팔아치울 것이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위상은, 밀랍날개를 달고 감히 태양에 접근하려다 밀랍이 녹아 바다에 빠진 그리스 신화 속의 이카루스처럼 자유낙하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중국은 달러 대신 국제통화기금(IMF)의 특별인출권(SDR)을 새 기축통화로 대체하자고 제안해 놓고 있다. 러시아·브라질·인도 등 브릭스 국가들은 이 제안에 긍정적이다. 미국과 늘 삐딱한 사이인 프랑스도 나쁠 것 없다는 태도다. 내달 초 FRB가 예상대로 추가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하면 달러 저항세력은 더 똘똘 뭉칠 것이다.

자유무역의 기수 노릇을 하던 미국이 슬쩍 보호무역으로 깃발을 바꿔 들고 중국 때리기에 나선 것은 흘러간 필름을 보는 듯하다. 전통적으로 개방과 자유무역은 강대국의 논리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시절 미국은 영국산 공산품의 홍수에 맞서 유치산업 보호정책을 폈다. 그러던 미국이 자유무역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2차 대전 후의 일이다. 그러다 불리하면 불쑥 보호무역 카드를 꺼내들곤 했다. 1980년대엔 일본 때리기가 유행했다. 의원들은 워싱턴 의사당 앞에 일제 전자제품을 모아놓고 망치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즐겼다. 그러더니 이젠 중국 때리기다.

세상 참 요지경이다. 중국이 자유무역의 기수를 자처하고 나설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중국의 녹색산업 보조금 실태를 조사하겠다는 미국의 결정에 대해 중국 상무부는 "국제사회에 보호무역주의라는 나쁜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비판했다. 자유무역 찬양은 한국도 뒤지지 않는다.
G20 정상회의에서 새로운 무역장벽 도입을 금지한 '스탠드스틸(Stand-still)' 원칙을 주창한 것은 바로 한국이다. 그런 한국에 겁이 났던지 일본에선 한국 때리기가 한창이다. 중국의 도전에 쩔쩔매는 미국, 한국의 약진에 안절부절 못하는 일본을 보고 있자니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paulk@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