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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정치가 산통 깰까 겁난다

[이재훈 칼럼] 정치가 산통 깰까 겁난다

2002년 2월 독일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저성장·고실업의 '독일병'을 치유하기 위해 자동차 업체 폭스바겐의 인사담당 이사인 페터 하르츠를 노사정위원장에 앉혔다. 고뇌 어린 결단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였다. 하르츠는 1990년대 중반 경영악화로 대량해고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른바 '폭스바겐 방식'에 의한 노사타협으로 성공 신화를 쓴 사람이다. 주 28시간 및 4일 근무체제를 도입하되 임금을 대폭 삭감하는 비상 조치를 통해 대량해고를 막은 것이다. 실업률을 끌어내리고 고용률을 높이자는 지상과제를 풀기에는 이만한 적임자가 없었다.

하르츠 위원장은 "나라를 바꾸는 것은 결국 현실에 대한 직시와 위기감 공유다" "일을 적게라도 하는 것이 일자리를 잃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며 노사 양측을 끈덕지게 설득했다. 그 결과 '하르츠 개혁안'이 탄생한다.

하르츠 개혁안은 미니잡(월급여 450유로), 미디잡(월 450~800유로) 같은 저임의 시간제·일시적 일자리를 늘리고 파견근로·해고 관련 규제를 완화하는 고용 유연화 정책이다. 월 수십만원짜리 일자리를 보급하겠다는 정책이니 누구나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같으면 "모두를 극빈자 만들 작정이냐"며 들고일어났을 법하다.

이런 개혁안으로 노사 대타협을 이끌어낸 하르츠도 대단하지만 이를 군말 없이 수용한 슈뢰더 총리는 더 놀랍다. 좌파 사민당 출신인 그에게 당론을 거스르는 하르츠 개혁안은 큰 부담이었다. 그러나 개혁안 입안 과정에서 개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토대로 마련된 구조개혁정책인 '어젠다 2010'을 밀어붙였다. 그는 그렇게 해서 죽어가던 독일경제를 살려냈으나 사민당 내부 반발과 국민의 인기 하락으로 총선에서 패배했고 총리직을 물러났다.

우리 사회에서도 노사정 대타협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정년 60세 연장, 근로시간 단축, 통상임금 판결 등 기업의 경영과 고용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노동 현안들이 쏟아짐에 따라 임금·고용체계 개편이 시급해졌다. 현안들을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노사가 패키지 딜을 시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다뤄야 할 노사정위원회는 식물 상태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정치권이 노사 대타협을 도출하겠다며 나섰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21일부터 4월 15일까지 '노사정 소위원회'를 가동한다.

명분은 일견 그럴 듯하다. 노사 협의가 한발짝도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회가 중재해보겠다는 데 토를 달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런 노사 문제에 정치가 섣불리 끼어들어서 일이 풀릴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거부해온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소위 구성을 환영했다. 반면 노사정위원회 재가동을 모색했던 정부는 머쓱한 표정이고 경영자총협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사측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국회 환노위 내 소위 구성은 양대 노총의 요청에 의해 성사된 것이라 한다. 환노위가 어떤 곳인가. 야당의원이 여당의원보다 많은 '여소야대' 상임위인 데다 내로라하는 노동운동가 출신들이 다수 포진한 급진세력의 집결지다. 소위 참여 의원 4명 중 3명이 노동계 거물 출신들이다. 환노위는 또 기업에 과징금 폭탄을 안긴 화학물질 관리법, 화학물질 등록·평가법 등 반기업적 규제법안들을 거침없이 처리한 상임위다. 소위 구성 자체에서 노사 간 세력 균형이 깨져 있다. 사측이 소위 참여를 내키지 않아 하는 이유다.

노사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면 배가 산으로 가기 십상이다. 친노조 성향 의원들이 나선다니 노조 편향적인 합의를 유도할 것이란 우려가 드는 게 당연하다. 임금·고용체계 개편은 기업과 노동자의 존망을 가를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끝없이 토론을 벌여 결론을 내야지 적당히 정치적인 타협을 시도할 일이 아니다. 이게 하르츠 개혁의 성공이 주는 교훈이다. 졸속·억지 타협은 노사 모두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국회에 당부한다. 과욕 부리지 말고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만 해주기 바란다.
막혀 있던 노사 대화의 물꼬를 제대로 트기만 해도 국회는 한 건 단단히 했다는 칭찬을 받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노사가 노사정위원회로 무대를 옮겨 협의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국회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