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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전세가 기가 막혀

[이재훈 칼럼] 전세가 기가 막혀

사전을 찾아보면 '전세(傳貰)'를 지칭하는 영어 단어가 따로 없음을 알게 된다. 그냥 'jeonse'로 되어 있다. 마치 '재벌'을 'chaebol'이라 표기하는 것과 같다. 위키피디아는 전세를 '한국의 독특한 부동산 임대차제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외국인에게 한국의 전세제도는 알쏭달쏭한 존재다.

1980년대 미국 대학에서 전세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을 지낸 A씨도 유학 시절 미국인 지도교수를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었다. 지도교수는 처음에 전세가 도무지 경제원리에 맞지 않는 거래제도라고 했다. 그는 특히 "집주인이 별도로 임대료를 받지 않고 전세금을 받아둔 뒤 나중에 그대로 돌려주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한다. 집주인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이다.

A씨는 △주택보급률이 낮은 한국에서 집값은 무조건 오른다는 인식이 있어 모두가 집 장만에 목을 맨다 △개인은 집 살 돈이 부족하고 은행대출을 받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세입자에게 목돈(전세금)을 받아 내 돈을 합치면 집을 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 경우 임대소득은 훗날 시세차익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전세제도는 결국 낮은 주택보급률과 높은 주택 수요, 집값 상승 기대감, 고금리와 자본조달의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시장이 만들어낸 아이디어 상품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요즘 '미친 전셋값'이 또다시 주택시장을 몰아치고 있다. 아파트단지에 전세 매물은 씨가 말랐고 전국 전셋값은 25주 연속 올랐다. 서울아파트 평균 전셋값이 3억원을 넘어섰다. 전국 전세가율(매매값 대비 전셋값의 비율)은 이달에 70%를 돌파해 사상 최고수준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전셋값이 미친 게 맞다. 사방에서 정부는 뭐하느냐고 아우성이니 정부도 '10·30 서민주거비 부담 완화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이 나오자 이번에는 "전세난에 무슨 월세 세입자 대책만 제시하느냐"며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단숨에 '미친 전셋값'을 때려잡을 묘안을 제시하는 사람은 없다.

전셋값은 2000년대 후반부터 계속된 부동산시장 침체기에 줄창 올랐다. 전세가율이 60%를 넘어가면 집값이 오른다는 속설도 옛말이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세계 유일의 전세제도를 떠받치는 전제조건들이 그 사이 모두 무너졌다. 주택보급률은 2012년 현재 103%로 이미 100%를 넘어섰고 집값 하락세는 몇 년째 계속됐다. 인구 증가율 둔화와 급속한 고령화로 집값 상승 기대감도 떨어졌다. 주택담보대출 확대로 돈 구하기가 쉬워진 반면 저금리 추세로 전세금을 받아 굴리기는 어려워졌다. 이러니 모두가 집을 사지 않으려 한다. 집 살 여력이 있는 사람들도 전세로만 몰려든다. 집주인은 세금·유지보수비·이자 부담에다 집값 하락에 따른 손실까지 짊어져야 할 판이다. 자선사업가가 아닌 바에는 전세금을 대폭 올리든지 월세 또는 반전세로 돌려야 할 이유가 충분한 셈이다.

전세 수요와 공급 사이 균형은 완전히 깨진 상태다. 수급 균형이 복구될 가능성도 현재로선 보이지 않는다.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것은 전세제도가 이미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남은 것은 전세제도의 퇴장이다. 사라질 운명에 처한 제도를 유지시키려 바둥거려봐야 정책 실패를 초래할 뿐이다. 정부가 할 일은 전세제도 퇴출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전세 수요를 줄이고 공급을 늘리는 데 충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공공임대주택 공급확대책은 시간이 걸리는 탓에 당장 전셋값을 잡는 효과는 없다. 전세의 월세 전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한 정부 대책은 뜨뜻미지근해 보이지만 옳은 방향이다. 지난해 전세자금 대출 확대 조치가 전셋값에 기름 붓는 결과를 낳은 사실을 상기해보라. 전세 수요를 늘리는 정책은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역주행이다.
야당에서 주장하는 전·월세 상한제는 그래서 위험하다.

정부로선 전세 수요를 매매 수요로 돌리거나 월세로 연착륙시키는 방법에 집중할 일이다. 전세 문제는 정책적 선택지가 많지 않다. 게다가 퇴장을 앞두고 미쳐버린 전셋값을 찍어누를 '요술방망이'가 있을 수 있겠나.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