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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복지 논쟁, 배가 산으로 갈라

"국회 합의부터" 손놓은 정부.. 정치권은 중구난방 제 주장만

박근혜정부의 도그마인 '증세 없는 복지'와 관련한 백가쟁명식 논쟁이 1라운드를 마쳤다. 여당인 새누리당의 김무성·유승민 '비박(非朴) 투톱' 지도부의 '내부 고발'로 촉발된 논쟁은 지난 1주일간 블랙홀처럼 정치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여버렸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요, 국민을 속이는 것"이란 '투톱'의 일갈은 현 정부의 정책기조에 대한 정면도전이자 정책주도권을 당이 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여당에 이슈를 선점당했다. 올 들어 연말정산 파동과 건강보험 개편안 철회 등 잇따른 실책으로 논쟁의 빌미를 제공한 정부도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작금의 세금·복지 논쟁은 증세를 먼저 할 것이냐, 복지 구조조정을 먼저 할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로 압축된다. 국민의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들에게는 너무나 민감한 사안이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표가 허공으로 날아갈 것을 각오해야 할지 모른다. 세금을 무리하게 늘리면 조세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다. 담뱃세 인상, 연말정산 파동이 '꼼수증세'였다는 비판 때문에 복지논쟁이 불붙은 것 아니던가. 야당이 표와 관계없는 법인세 인상을 줄창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복지구조조정은 증세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국민들이 세금을 올리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복지 혜택을) 줬다가 빼앗는 것"이라며 "복지 구조조정은 현재의 복지 수준을 축소하는 식이 아니라 미래 목표치의 수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무성 대표는 "증세는 마지막 수단"이라며 "복지예산이 잘 쓰이고 있는지 전면 점검해서 잘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당 내에서는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재벌 회장 손자도 공짜 밥을 먹는다"며 무상급식을 먼저 손볼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야당의 생각은 반대다. 우윤근 새정치연합 원내대표는 "무상급식 등 기본적 복지는 축소하면 안 되지만 나머지는 '선별적 복지'를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발언에 당내가 술렁거리자 그는 "복지를 축소하자는 뜻이 아니다"라며 '조세개혁'을 들고 나섰다. 문재인 신임 새정치연합 대표는 "복지는 지금보다 더 확대돼야 한다"며 "법인세를 정상화하고 고소득자와 자본소득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철저히 종전의 스탠스를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여야는 이처럼 중구난방식 복지논쟁을 벌이고 있다. 김무성 대표는 "더 피터지게 논쟁해야 한다"고 했지만 각자의 생각이 너무나 다르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논쟁에서 발을 빼고 있다. 최경환 부총리는 최근 국회에서 "증세와 복지 수준에 대해 국회가 합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주면 합의 결과를 수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을 국회에 넘겨버린 것이다. 정부가 이런 입장을 표명하게 된 것은 '증세 없는 복지'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정부가 너무 소극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증세를 하건, 복지 구조조정을 하건 그 주체는 정부가 돼야 한다. 정부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복지정책'이란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정치권에서는 벌써 여야가 법인세 인상과 선별적 복지를 맞바꾸는 '빅딜'을 할 것이란 때 이른 관측이 나오고 있다. 워낙 '딜'을 좋아하는 정치권 아닌가. 정치권이 지속 가능한 복지정책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고 합리적으로 논의할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지난해 말 여야는 담뱃세 인상과 지자체에 대한 무상보육 예산지원을 맞바꿨다. 서로가 그토록 반대했던 서민증세와 무상복지 확대를 나란히 주고받은 것이다.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경기활성화에 역행하는 법인세 인상 같은 것을 쉽게 채택할까 우려된다. 내년 4월이면 총선이 치러진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증세와 복지 문제는 정치인들에게 짐이 된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야합의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마냥 국회에 끌려다니면 곤란하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