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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리콴유의 실용, 부럽다

우리도 혁신DNA 본받아야.. 경제 살리려 카지노도 허용

[이재훈 칼럼] 리콴유의 실용, 부럽다

"앞으로 20년 후면 한국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국이 대체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한국 기업이 중국에 진출하고 있지만 10∼20년 후면 중국이 한국에 투자하는 세상이 된다. 그러니 한국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도약해야 한다."

"한국은 외국에 '갈등국가'로 비친다. 한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미래 한국의 모습에 대한 '국민적 합의'다."

9년 전인 2006년 5월 백발의 노신사가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아프게 지적했다. 당시에는 과장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는데 지나고 보니 신기하게도 한국의 현 상황과 꼭 맞아떨어진다.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애정 어린 충고를 해준 사람은 바로 지난 23일 타계한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다. 그가 방한 중 고려대 강연에서 쏟아낸 쓴소리들이 다시금 폐부를 찌른다. 우리는 이런 처방을 받고도 무엇을 하고 있었나.

1990년대 초까지 한국과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며 기적 같은 경제성장을 일궜다. 그 후 한국은 주춤하고 싱가포르는 계속 뻗어나가 두 나라 간 경제력 격차가 벌어졌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아시아 신흥국들은 일제히 경제침체에 빠졌다. 싱가포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계 금융·물류의 중심지이자 오일허브, 정유·전자산업 중심지이며 뛰어난 지정학적 위치에 낮은 세금, 뛰어난 인프라, 우수한 인적자원을 갖춘 규제 없는 투자천국 싱가포르도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 성장동력이 필요했다. 리콴유가 한국에 주문한 '완전히 새로운 것' 말이다.

리콴유의 경제철학은 '실용과 효율'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잘살기 위한 일,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실용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 카지노 합법화와 복합리조트 건설이다. 2004년 8월 총리에 오른 아들 리셴룽은 얼마 뒤 카지노 허용을 골자로 한 관광산업진흥방안을 발표했다. 마약·도박 등의 범죄와 부패가 없는 도덕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리콴유 필생의 꿈이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도박만은 안 된다"던 그가 "싱가포르가 생존하는 데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며 미련 없이 돌아선 것이다.

리콴유의 싱가포르는 지난 50년간 끊임없이 혁신의 길을 걸었다. 중개무역·석유유통·항만·공항 등 물류허브에서 제조업, 금융중심지로 영역을 넓혔다. 투자규제를 혁파하고 개방성을 높여 외국자본의 진출을 적극 수용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관광·의료·교육 등 서비스산업의 허브로 발돋움하고 있다. 카지노 합법화로 마리나베이샌즈와 리조트월드센토사 등 2개 대형 복합리조트가 들어선 2010년 싱가포르는 엄청난 관광수입 등으로 경제성장률이 14.5%로 치솟기도 했다.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6000달러로 세계 8위, 아시아 1위다. 반면 한국은 9년째 2만달러대에서 맴돌고 있다. 세계은행은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비즈니스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선정했다. 세계 경제자유도 2위, 해외직접투자(FDI) 유입 규모 6위를 자랑한다. 한국과 싱가포르는 이제 비교대상이 아니다. 리콴유 타계 이후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싱가포르의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관측도 있지만 국가경제 면에서는 그가 싱가포르에 심어놓은 실용과 혁신의 DNA는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박근혜정부는 경기침체를 타개하겠다며 규제개혁을 통한 투자 활성화, 내수서비스업 활성화를 표방했다. 싱가포르의 실용주의를 벤치마킹한 듯한 정책도 많았다.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리조트 허용, 의료관광산업 활성화 등이다. 그런데 이런 규제개혁 방안들이 이해집단의 반발 등으로 도무지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개방화, 자유화, 탈규제는 항상 경제민주화, 기존 사업자 보호 같은 주장에 부딪혀 국회 법처리 과정에서 발이 묶이곤 한다. 리콴유가 쓴소리를 했던 9년 전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한국과 싱가포르 같은 소규모 개방경제에서는 경제정책의 선택지가 많지 않다. "생존에 필요하다면 뭐든 해야 한다"는 리콴유의 일갈이 와닿는 이유다. 리콴유의 실용주의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덕목이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