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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왜 한국엔 빔 콕이 없나

노사정 대타협 무용론 부각.. 절박함 없는 노조는 반대만

[이재훈 칼럼] 왜 한국엔 빔 콕이 없나

노동시장 구조 개선을 위한 노사정 협상이 일단 결렬됐다. 노사정위원회의 타협시한이 한참 지났는데도 쟁점 정리는 안 되고 논의의 갈래는 오히려 복잡해진 탓이다. 한국노총은 일반해고 요건완화 등 기존의 '5대 수용 불가 사항'에 더해 근로기준법 확대 적용 등 '5대 핵심 요구안'을 제시했다. 노사정 대화를 단체교섭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노동개혁은 노사의 양보를 전제로 한 것이다. '5대 요구안'은 협상 결렬의 구실일 뿐이다.

노사정 대타협에 대한 세간의 기대는 이미 시들해졌다. 전문가들 반응이 그렇다. 지난달 말 열린 어느 토론회에서 김동원 고려대 교수는 "노사정 대타협은 외환위기 같은 때나 가능하다. 위기에 대한 공감대가 없으면 타협이 안 된다"고 말했다. 노사정위 공익위원인 김태기 단국대 교수는 "노사정 합의가 불가능한 경우 국민적 합의에 의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래서 사회적 대화 무용론, 노사정위 무용론이 제기된다. 타협을 하더라도 뼈 빼고 따귀 뺀 선언적인 내용에 그칠 거란 예상이 파다하다.

지난해 말 노사정이 노동시장 구조개선에 관한 기본 원칙에 합의했을 때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은 "네덜란드 바세나르 협약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난 3개월여의 논의 과정과 결과는 노사대타협의 모범사례인 바세나르 협약 때와 너무나 대조된다. 앞서 김동원 교수의 지적처럼 우리 노사정은 절박함이 없다. 특히 노조는 기득권을 내려 놓을 뜻이 전혀 없다. 한국 경제가 얼마나 위기인지 공감하지 않는 노조라면 '철밥통 지키기'만 생각하게 마련이다.

1982년 11월 네덜란드 바세나르 협약의 주역은 빔 콕 당시 노총위원장이었다. 그 무렵 네덜란드는 과도한 복지, 경제침체, 높은 물가상승률, 치솟는 실업률 등으로 심각한 '네덜란드 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헤이그 인근 소도시 바세나르에서 크리스 반 빈 경영자연합 회장과 며칠 밤낮을 협상한 끝에 노조는 임금을 삭감하고 기업은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리는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협약 때문에 빔 콕은 "노동자를 팔아먹은 배신자"란 비난에 몰렸다. 심지어 사용자 측은 "이 험한 일을 정부에 맡기지 왜 우리가 하나"라며 불평했다고 한다. 그는 "경제난이 깊어지고 실업자가 급증하면서 모두가 망할 것이란 위기감 때문에 뭔가를 해야 했다"고 당시의 절박함을 설명했다. 협약 이후 네덜란드 병은 말끔히 치유됐다.

협상이 삐걱거리면서 한국노총의 대표성 문제도 제기됐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은 10.3%에 불과하다. 게다가 한국노총은 4.6%의 노동자만 대변할 뿐이다. 90%에 달하는 노동 약자는 공중에 떠버린 상태다. 이번 협상의 최대 쟁점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즉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 해소다. 여기에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목소리만 반영된다면 형평에 맞지 않다. 노사정위원회 구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세나르 협약 당시 네덜란드의 노조 조직률은 40%나 됐다.

정부의 어설픈 전략도 협상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정부는 노사 협상이 잘 진행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지난해 말 비정규직 종합대책안을 공개해 노조의 반발을 샀고 이후에는 최저임금 인상 방침을 제시함으로써 유력한 협상카드를 날려버렸다. 이게 정부에 대한 노사 양측의 불신을 부추겼다. 오죽하면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이 "최저임금을 올리겠다는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발언 탓에 조합원 기대치가 높아져 설득이 안 된다"고 호소했겠나.

흔히들 바세나르 협약에서 정부의 역할을 간과하곤 한다. 하지만 루드 루버스 당시 총리의 뚝심이 없었으면 협약도 없었다. 루버스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임금 억제에 노사가 타협하지 않으면 정부가 개입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그리고 "정부부터 솔선수범하겠다"며 공무원 임금 동결을 발표했다.
그의 비장한 압박에 노사는 타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노사 타협을 유도하되 이것이 안 될 경우 대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정부도 이제는 독자적인 노동개혁 추진방안을 가다듬을 시점이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