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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고무줄' 배임죄 이대로 둘건가

재계 "경영판단 원칙 도입을".. 오락가락 판결, 기업에 혼란

재계가 배임죄 적용을 엄격히 하기 위해 상법에 '경영판단의 원칙'을 명문화해달라고 법무부에 건의했다. 경영실패가 아닌 개인적 이익을 얻기 위한 의도적 행위에만 배임죄를 적용해달라는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헌법재판소의 배임죄 합헌 결정을 계기로 이 같은 의견을 법무부에 제시했다고 밝혔다. 투자, 구조조정 등 경영상 판단에 따른 행위가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해를 입혔다 해서 이를 처벌한다면 경영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배임죄는 법규정이 모호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적용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한국의 기업인은 어느 누구도 배임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형법에는 업무상 배임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라고 규정돼 있다. 기준이 불분명하다. 게다가 세계적으로도 배임죄가 적용되는 나라가 몇 되지 않는다. 그나마 독일, 미국, 일본은 주식법이나 판례에서 경영판단은 면책하고 있다. 배임을 형사처벌하는 나라도 거의 없다. 대부분 민사상 손해배상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경영판단의 원칙에 대해 명문화된 규정이 없을뿐더러 재판부에 따라 이 원칙 적용이 오락가락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경련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영판단과 관련된 배임죄 판례 37건 중 실제 경영판단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따진 것은 절반가량인 18건에 불과했다. 또 경영판단의 원칙 적용 여부에 따라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유무죄 판단이 엇갈린 판례가 12건이나 됐다.

수많은 기업인이 배임죄에 걸려 처벌을 받았다. 배임죄는 특히 반기업 정서가 확산될 때 손쉽게 기업인을 얽어 넣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경향도 있었다. 심지어 성공한 경영판단도 배임죄 적용을 피해갈 수 없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부실 계열사(한유통, 웰롭)를 적절히 지원해 회생시켰고 다른 그룹 계열사들도 살렸지만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배임죄 법조항 정비는 첫손 꼽히는 재계의 숙원이다.

사실 전경련의 건의사항을 반영한 법안이 이미 오래전 국회에 제출돼 있다. 이명수 새누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법개정안에는 "이사가 어떠한 이해관계를 갖지 않고 경영상 결정을 하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 하더라도 의무위반으로 보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이 삽입됐다. 그러나 이 법안은 "기업 오너의 편법행위를 면책해주는 악법"이라는 야당·시민단체의 반발로 2년 넘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시들어가는 경제을 살리려면 기업이 투자를 하고 공격경영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기업들은 잔뜩 움츠러들어 있고 기업가정신은 실종 상태라는 지적이 비등하다. 걸면 걸리는 배임죄 문제도 여기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정부와 정치권은 더 이상 배임죄 문제를 내버려두지 말고 해법을 도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