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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혼돈과 불신의 대타협

17년만에 합의한 노사정 일반해고 등 쟁점은 미뤄 노동개혁은 이제부터 시작

[이재훈 칼럼] 혼돈과 불신의 대타협

노동개혁에 관한 노사정위원회의 합의를 놓고 평가가 분분하다. "시대의 요청과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는 역사적 결단"(새누리당), "17년 만에 성사된 사회적 대타협"(박근혜 대통령)이란 최상급 찬사와 "최악의 야합"(민주노총), "고용의 질을 하향평준화하는 합의안"(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혹평이 충돌한 것은 이미 예상됐던 바다. 원래 극심한 갈등 속에 도출된 '사회적 합의'에는 뒷말이 많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9.13 합의'는 예상 밖으로 광범위한 논쟁을 유발하는 것 같다.

합의의 당사자인 노동계와 경제계 모두가 달가운 표정이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 5단체는 지난 14일 노사정이 서명한 합의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노동개혁이라고 평가하기에 매우 부족하다. 국회 입법청원을 통해 마지막 시도를 하겠다"고 밝혔다. 향후 협의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오버액션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사측에서 먼저 대타협에 대한 기대를 접고 제 갈 길을 가겠다는 선전포고를 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반면 김동만 한국노총 위원장은 "청년고용과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면서도 "추후 협상에서 (노동)현장에 불이익이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9.13 합의가 핵심 쟁점들을 줄줄이 피해간 미완의 합의이기 때문이다. 최대 쟁점은 일반해고 도입과 취업규칙 변경 요건의 완화 문제다. 한노총이 극구 반대했던 사안이기도 하다. 노사정은 저성과자에 대한 일반해고에 대해 '노사 및 전문가 참여하에 개선방안을 마련한다'며 중장기 과제로 돌렸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노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쳐' 법제화한다는 전제도 달았다. 임금피크제 시행의 근거가 되는 취업규칙 변경 완화도 관련 요건과 절차를 명확히 한다는 다분히 선언적인 내용을 채택했다. 결국 두 가지 쟁점은 노사정이 시간을 두고 협의하겠다는 뜻이다. 이들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입법화할 대상도 아니다. 벼르는 야당이 머쓱해할 일이다.

'충분한 협의'에 대한 노동계.야당과 경제계의 해석도 엇갈린다. 전자는 "'합의'의 강제성이 없으니 정부 뜻대로 모든 것을 처리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은수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헌법과 노동법을 '협의'란 말로 무력화하고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후자는 "이제 노동계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 노동시장 경직성을 고착화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임금체계 개편이다. 근무연수만 채우면 자동으로 임금이 올라가는 호봉제를 폐지하고 업무 성과에 따라 임금을 책정하는 체계를 채택하는 문제다. 대기업.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구직자 간의 차별, 즉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이 노동개혁의 목표라면 임금체계 개편은 필수적인 과제다. 그런데 이번 합의문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명확하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라고 하는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9.13 합의에 대해 'F학점'을 매겼다. 그는 "특히 임금체계를 직무급과 성과급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한데 진도가 나간 게 없다"고 지적했다.

노사정은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 파견근로 확대 문제도 실태조사와 전문가 의견 수렴을 통해 대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비교적 명확한 합의는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이를 통해 확보된 재원을 청년고용에 활용한다는 내용 정도다. 이러니 이번 대타협은 '협의를 계속하겠다는 합의'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온다.

임금피크제 시행만으로 우리 경제의 고질병인 노동시장 경직성을 치유할 수는 없다.
따라서 노동개혁은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다. 노사정이 핵심 쟁점을 장기과제로 미루고 골든타임을 허비하다간 노동개혁도 공무원연금 개혁처럼 용두사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이게 가장 두렵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