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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합의제 개혁'은 없다

노사정은 두달간 헛바퀴.. 국회는 "합의 파기" 공방만.. 공무원연금 전철 밟을라

[이재훈 칼럼] '합의제 개혁'은 없다

박근혜정부의 노동개혁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노사정위원회는 '9.13 합의' 이후 두달 넘도록 세부 개혁방안에 대해 논의다운 논의를 해보지 못했다. 노사정위는 핵심 쟁점인 기간제 사용기간 및 파견제 확대 문제에 대해 합의안을 내지 못하고 공을 국회로 떠넘겼다. 일반해고 도입.취업규칙 변경 완화 문제는 아예 논의조차 못했다. 허송세월도 도가 지나치다.

이 때문에 여당인 새누리당은 기간제법, 파견법 등 노동개혁 5개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 안에 일괄처리하겠다는 방침으로 밀어붙이고 있지만 정작 법안을 심의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정부.여당이 노사정 합의를 위반하고 있다"는 야당의 반대로 인해 초장부터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노사정위 탈퇴"를 거론하며 장외로 뛰쳐나갈 기세다. 시간이 흐를수록 만사가 꼬여만 간다. 노동개혁은 이제 골든타임을 놓칠까 조급해하는 정부.여당과 버틸수록 유리해진다고 보는 노동계.야당 간의 시간싸움으로 변질됐다.

'9.13 합의'의 속내용을 좀 안다는 사람들은 이런 난맥상에 대해 그다지 놀랍지 않다는 반응이다. 애초부터 노사정의 후속 논의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17년 만에 성사된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정부의 프로파간다가 무색하게도 노사정은 합의문 도처에 많은 '지뢰'를 심어놓고 미봉했다.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문제는 중장기 과제로 분류하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충분한 노사 간 협의를 거친다'는 단서까지 달아놓았다. 기간제.파견근로 문제도 공동실태조사 등을 통해 대안을 마련한다고 규정했다.

노사정은 쟁점에 대한 합의를 줄줄이 미뤘다. 이러니 9.13 합의가 "협의하겠다는 합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동의"(조동근 명지대 교수)라는 비아냥을 듣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교사'라는 이한구 새누리당 의원은 "정부가 보여주기식 성과에 집착해 노동개혁의 핵심 사안을 포기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후 노사정은 쟁점 하나하나에 한 치도 양보 없이 무한정 대치했고 파국 직전까지 이르게 됐다.

이쯤에서 노동개혁의 방법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노사정이 사회적 합의를 통해 개혁을 추진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양보와 타협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이런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특히 많은 전문가들은 개혁의 대상인 한노총이 노동개혁을 입안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게다가 한노총은 현재 한국 경제가 위기상황이라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양보할 생각이 없다. 김동원 고려대 교수는 "외환위기 때 같은 위기감이 없으면 노사정은 결코 타협을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노조의 대표성, 나아가 노사정위의 대표성도 의심받고 있다. 전체 근로자 기준으로 한노총 가입률이 4.5%에 불과하다. 이런 한노총이 근로자를 대표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중소기업, 비정규직, 청년실업까지 대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 문제에 대해 630만 비정규직 근로자의 의견은 듣지도 않고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한노총이 목청을 높이는 것은 아이러니다.

우리 노동개혁의 벤치마킹 대상은 2002년 독일의 하르츠개혁이다. 한데 하르츠위원회는 이해 당사자를 배제한 전문가 15명으로 구성됐다. 위원회는 객관적 관점에서 개혁안을 입안했고, 정부는 이를 강력히 지지했다. 위원회 가동 10개월 만에 첫번째 개혁안이 시행될 수 있었던 이유다. 우리도 이런 개혁방식을 택했어야 했다.
앞서 공무원연금 개혁도 이해 당사자인 공무원노조와 합의를 강조하다가 용두사미가 되지 않았던가.

엊그제 박 대통령이 각종 경제관련법안을 처리 않고 미적대는 국회를 격하게 타박했다. 그래도 노동개혁 5법의 처리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시간은 정부.여당 편이 아니다. 중소기업.비정규직 근로자와 청년실업자들의 눈물은 도대체 누가 닦아줄 것인가.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