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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준조세 전성시대

세금 안걷고 정권사업 추진.. 현정부 들어 기업부담 가중
상생기금, 빙산의 일각일 뿐

[이재훈 칼럼] 준조세 전성시대

정부와 정치권에 기업은 역시 '봉'이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의 대가로 조성키로 한 1조원의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둘러싸고 달아올랐던 '준조세' 논란이 이내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경제단체들에 기금 조성에 찬성 입장을 발표하라고 강요했던 정부가 이번엔 함구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평소 재계 입장을 적극 대변해온 한 인사는 "앞으로 FTA와 관련해 실명 코멘트를 하지 않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며칠 전 정부 모처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고 실토했다. 정부는 "재계의 숙원인 한.중 FTA 비준을 위해 여.야.정이 어렵사리 타협했는데 재계가 재를 뿌려서 되겠느냐"며 준조세 시비를 접어두라고 요구했다. 기업은 또다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정부가 준조세 논란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도 이번에 드러났다.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위관료가 잇따라 나서 "기업별로 할당하지 않는 자발적 기부금" "기업들이 기존에 내는 농어촌지원금을 상생기금으로 돌리면 세제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부담이 없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상생기금이 준조세란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준조세의 사전적 정의는 '조세 이외의 법정부담금, 사회보험, 기부금, 성금 등 기업이 비자발적으로 부담하는 금전적 의무'다.

박근혜정부 들어 준조세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는 비판이 진작부터 제기되고 있었다. 지난해 정부가 걷은 준조세(95개 법정부담금+ 사회보험료)는 58조6000억원으로 법인세(42조6000억원)나 연구개발(R&D) 투자액(43조6000억원)보다 많았다. 기부금.성금의 증가세는 더 심각하다. 이명박정부에서 연평균 4조1000억원이던 기부금은 2013년 4조7000억원, 지난해 4조9000억원으로 늘었다.

요즘 대기업들이 속속 동참하고 있는 청년희망펀드를 보자. 박 대통령은 지난 9월 21일 청년층의 일자리 창출을 돕자는 취지 아래 일시금 2000만원과 매월 월급의 20%인 340만원을 기부하며 '1호 가입자'가 됐다. 이후 '관 주도 준조세' 논란이 일자 정부는 개인 차원의 기부만 받겠다고 했다. 그러자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200억원, 임직원 50억원 등 개인 명의로 250억원을 냈다. 현대차, LG, SK 등이 뒤를 따랐고 그렇게 모인 돈이 1000억원을 넘는다.

창조경제혁신센터도 결국은 준조세다. 창조경제 성과가 미미하다는 지적이 있자 정부는 15개 기업에 수백억원을 할당해서 각 도시별로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세웠다. 주요 대기업들은 평창동계올림픽에도 500억~1000억원을 출연했다. 한류 확산을 위해 정부가 세운 재단법인 '미르'에는 16개 기업이 486억원을 냈다. 도처에 기부금이다.

농어촌상생기금 파문에서 봤듯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에 너무나 쉽게 준조세 부담을 안긴다. 증세를 하지 않고 예산 투입도 없이 정권 역점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이명박정부도 준조세를 적극 활용했다. 10년간 기업, 금융회사에서 2조원을 걷기로 한 미소금융은 아직도 기금을 걷고 있지만 사업은 이미 오그라들었다. 동반성장기금 또한 87개 대기업이 7184억원 출연을 약정했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열기가 식었다.

이런 사업들은 재정을 투입해 추진하는 것이 맞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며 부담을 얹는 것은 포퓰리즘이나 다름 없다. 박근혜정부가 규제를 혁파하고 경제활성화법 통과에 목을 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기업의 비용부담을 줄여 투자와 경제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기업들은 세금보다 더 무거운 준조세 부담에 짖눌려 있다. 기업 주머니나 터는 정부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면 누가 믿겠나.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