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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영 칼럼] 김영란의 실험

소득 높다고 선진국 되지 않아
28일 시행 김영란법 정착시켜 부패 없는 공직문화 만들어야

[염주영 칼럼] 김영란의 실험

김영란의 실험이 시작된다. 우리 국민의 경제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되는 실험이다. 성공한다면 대한민국 경제사에 김영삼 대통령이 주도했던 금융실명제와 견줄 만한 큰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보다 돈질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런 믿음이 있는 한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소득이 많다고 해서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경제 시스템과 청렴한 공직문화가 있어야 한다. 기업들이 사용하는 접대비가 한해 10조원이나 된다.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접대비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재원의 낭비도 문제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뇌물성 접대비가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뇌물과 부정한 청탁이 성행하면 신뢰자본이 훼손돼 시장경제는 발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역대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공직부패 척결을 주요한 국정 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어느 정부도 이 과제에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과 책임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사법부의 몫이다. 우리 사법부는 오랫동안 '대가성 없는 뇌물'이 있다고 믿었다. 남남 사이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수천만원의 금품이 오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돈을 받더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이 같은 판단은 대가성만 없으면 뇌물을 받아도 된다는 풍조를 낳았다. 그 폐해는 컸다. 수많은 공직자들의 청렴의지를 무뎌지게 했으며 그 결과 법의 수호자인 판검사들마저도 뇌물을 받는 세상이 돼버렸다.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들어가면 선배들이 하는 말이 있다. '돈을 잘 가려서 받으라'는 것이다. 깨끗한 돈, 즉 대가성이 없는 돈은 받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초보 공직자로서 마땅히 사법부와 선배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하겠으나 대가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깨끗한 돈과 뇌물의 경계선은 어디일까. 뇌물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을 매수하여 사사로운 일에 이용하기 위해 건네는 부정한 돈이나 물건'이다. '매수' '사익추구' '부정' 등의 의사가 담겨 있으면 뇌물이고, 그렇지 않으면 깨끗한 돈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 다양한 변종들이 존재해 경계선이 모호한 것이 현실이다. 금품을 건넬 당시에는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나중에 사익 추구의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 또한 처음부터 사익추구의 마음이 숨어 있었다 해도 제3자가 그 마음속을 열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 법원과 검찰은 구분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가정해 임의적인 잣대로 재판을 해 왔다. 개중에는 뇌물을 깨끗한 돈이라고 눈감아주는 재판도 있지 않았을까. 사법부에 이런 문제 제기를 한 사람이 김영란이다. 그가 제안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 금지법(김영란법)'은 깨끗한 돈과 뇌물의 경계선을 그을 때 주관적인 생각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객관적인 금액을 기준으로 삼자는 것이다.

그 김영란법이 28일부터 시행된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시행 초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농어민과 자영업자 등 서민계층이 타격을 입을 것으로 우려된다. 소비절벽으로 성장률이 단기적으로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부작용은 소비 경로가 달라지는 과정에서 생기는 마찰일 뿐이다.
우리 국민이 뇌물을 덜 쓰면 그 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 바뀌어 소비되거나 투자될 것이다. 과도기적 충격을 잘 견뎌내야 한다. 고통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