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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머스크가 한진해운 인수하면

정부의 대책없는 구조조정에 해운공룡 먹잇감 된 국적선사
한국 해운업, 생사 기로에 서

[이재훈 칼럼] 머스크가 한진해운 인수하면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지난 27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무릎 꿇고 사죄하며 "대한민국 해운업이 무너지고 있다. 제발 살려달라"고 읍소했다. 물론 당일 한진해운 주가가 19%나 급등한 것이 그 때문은 아니었다. 세계 최대 해운사인 덴마크 머스크라인이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을 인수할 수도 있다는 투자은행 제퍼리스의 분석이 주가에 불을 질렀다. 마침 머스크는 지난주 신규 선박을 건조하는 대신 인수합병(M&A)을 통해 성장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했다. 해운업계에는 심장이 쿵 내려앉을 만한 소식이다. 세계 7위의 국적선사가 이렇게 허무하게 외국기업에 넘어가는 것일까.

머스크와 그가 속한 최대 해운동맹 2M은 선박 대형화와 운송요금 인하를 통해 세계 해운업계의 '치킨게임'을 주도했던 '포식자'다. 2M의 머스크와 스위스 MSC는 상대적으로 약세인 태평양 항로 강화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들은 한진해운발(發) 물류대란이 촉발되자 기민하게 이 항로에 컨테이너선 여러 척을 추가투입했다. 태평양 항로에 강한 한진해운은 이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난 한달간 벌어진 '기이한' 물류대란을 보면서 세계 5위 해운국의 정부가 해운산업에 대해 도통 아는 게 없고 구조조정 복안조차도 변변히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나마 지금 드러난 재편방안은 살아남은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의 알짜 자산을 선별인수하는 것이다. 한진해운의 회생은 물 건너가고 있다. 산업은행은 현대상선 화주들에게 "물류대란에 동요하지 말라"며 보낸 서신에서 한진해운의 '파산 절차(bankruptcy proceedings)'를 언급했다. 정부는 한진해운을 이미 '괘씸죄'로 걸었다. 박근혜 대통령까지 "기업의 무책임과 도덕적 해이에 물류대란의 책임이 있다"며 작심 비판할 정도다. 정부가 앵무새처럼 반복해온 말이 "한진해운에 대한 자금지원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한진해운의 알짜 자산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해운사의 최대 자산은 노선 네트워크나 영업망 같은 무형의 신뢰자산인데 법정관리와 물류대란으로 다 무너졌다고 봐야 한다. 남은 건 선박이다. 한진해운이 보유한 컨테이너선 97척 중 60척은 빌린 배고 37척이 보유선박(자선)이다. 문제는 빈약한 현대상선의 자금력으로 자선 인수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머스크가 선박 인수에 뛰어들면 돈으로 싸우기는 어렵다. 채권단의 대규모 지원이 필요한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다.

머스크가 한진해운 인수에 성공하게 되면 정부와 채권단에는 '산업구조조정의 대실패'라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국가기간산업인 해운업을 망가뜨려놓고 외국기업에 헐값에 넘기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해운업에는 '시장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 제조업 등 무역을 하는 산업 전반의 물류비에 영향이 큰 데다 전시에 물자 및 인력수송을 맡는 안보산업이어서다. 덴마크.중국.독일 등 해운강국들은 하나같이 혈세를 투입해 자국 선사를 대형화하고 있다.

금융논리에 매몰돼 소중한 국가적 자산을 덜컥 법정관리에 몰아넣고 물류대란이 불거져도 "기업과 대주주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반응했던 정부다.
머스크 같은 해운공룡이 한국 해운업을 잠식하면 현대상선의 존립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외국 같았으면 진작에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합병을 통해 경쟁력 강화를 모색했을 것이다. 이런 정부가 조선.철강.석유화학.건설 등 나머지 취약업종 구조조정에서 무슨 사고를 칠지 걱정이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