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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 선거 불복

"저는 연방대법원 판결에 동의할 수 없지만 받아들이겠습니다. 결승선에 도달하기 전에는 많은 논쟁이 오가지만 일단 결과가 정해지면 승자나 패자나 받아들이는 것이 화합의 정신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보다 국가를 우선할 것입니다."

미국 대통령선거 사상 가장 치열했다는 2000년 대선에서 패배한 앨 고어 민주당 후보가 남긴 패배 인정 연설문이다. 당락을 좌우할 플로리다주 재검표를 앞두고 여론은 양분되고 국민들은 동요했다. 연방대법원은 답이 없는 재검표를 중단하고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인정했다. 고어는 솔직하고 절제된 연설문으로 아름다운 승복을 보여줌으로써 갈등과 분열을 막아냈다.

스포츠처럼 선거는 승패가 분명하다. 페어플레이를 펼치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는 문화는 깊은 감동을 준다. '지고도 이기는' 승복을 통해 패자는 재기의 동력을 확보하곤 한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1차 투표에서 승리한 김영삼 후보는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 억울할 법했지만 김영삼 후보는 "김대중씨의 승리는 나의 승리다. 어디든지 그와 함께 다닐 것을 약속한다"며 싹싹하게 인정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패배한 박근혜 후보는 깨끗하게 승복해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2012년 대선에서 패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패배를 인정한다. 국민께서도 박근혜 당선인을 성원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해 찬사를 받았으나 훗날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해 "대선이 불공정했다"며 말을 바꿨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가 지난 19일 3차 TV토론에서 "대선 결과 수용 여부는 그때 가서 말하겠다"며 불복을 시사해 온 미국이 벌집 쑤신 듯한 분위기다. 트럼프는 "내가 이기면 결과를 수용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240년 미국 대선 역사에 투표를 하기도 전에 불복을 시사한 것은 유례가 없다.

패자의 승복 연설은 1860년 대선에서 스티븐 더글러스 민주당 후보가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후보에게 패배를 공식 인정한 이후 이어져왔다. 트럼프는 이 오랜 전통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인의 자부심에 생채기를 냈다. 미국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을까.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