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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진주만

75년 전인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해군기지는 일요일을 맞아 평화로웠다. 오전 7시55분, 아침의 고요함이 깨졌다. 일본 연합함대에서 발진한 항공기 300여대가 진주만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었다. 무방비 상태인 진주만은 불과 3시간 만에 초토화됐다. 전함 7척과 20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됐고, 2400여명의 미군과 민간인이 사망했다. 태평양전쟁의 서막이다.

충격에 빠진 미국은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적개심을 불태웠다. 세계전쟁에 대해 불간섭주의로 일관하던 호랑이가 긴 잠에서 깨어난 순간이다. 결국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했다. 진주만 공습은 일본에는 달콤한 승리였지만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거인을 불러들여 패배를 자초한 셈이 됐다.

하와이 오아후 섬에 있는 진주만은 이곳의 명물 진주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영국 탐험가인 제임스 쿡 선장이 1778년 세 번째로 태평양 탐험을 떠났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곳이다. 물이 얕아 항구로 쓰이지 않았지만 미군의 방어기지를 건설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1887년 독점권을 얻은 미국은 이곳에 해군기지와 조선소를 건설했다.

전후 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미.일은 적이 아닌 동맹으로 손을 잡았지만 진주만과 히로시마는 70년 넘도록 금기어였다. 수많은 일본 총리가 미국을 찾았고,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지만 진주만과 히로시마는 애써 외면했다. 민주주의를 공유하며 두 세대를 넘긴 양국 국민에게도 복잡미묘한 감정이 깔려 있는 곳이다. 지난해 전후 첫 미 상.하원 합동연설을 성사시키며 미.일 신동맹을 선언했던 아베 신조 총리에게도 진주만 방문만큼은 허락되지 않았다. 노병들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오는 26, 27일 하와이를 방문해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위령하기로 했다.
지난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한 답방 형식이다. 하지만 침략전쟁에 대해 사죄하러 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로써 아베는 70여년 간 반복돼온 일본의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과 사과 논란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데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됐다.

mskang@fnnews.com 강문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