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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쇼’ 한다고 정경유착 끊어질까

호통치다 끝난 기업인 청문회, 원죄는 기업에 손벌리는 권력
정치개혁.규제혁파 우선돼야

[이재훈 칼럼] ‘쇼’ 한다고 정경유착 끊어질까

'전편만 한 속편 없다'고 하더니 6일 열린 '최순실 게이트' 관련 1차 청문회가 딱 그 모양이다. 1988년 일해재단 모금비리 청문회 이후 28년 만에 대기업 총수 9명이 청문회에 출석해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에 대해 증언했다. 총수 6명은 대를 이어 증언대에 섰다. 그러나 그때건 지금이건 정경유착 의혹이 속 시원히 규명된 건 없다.

28년 전에는 "시류에 따라 편히 살려고 돈을 냈다" "기업이 권력 앞에서 왜 만용을 부리겠나"라며 모금의 강압성을 밝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시원시원한 화법이 그나마 흥행요소였다. 이번 청문회에선 "청와대 요청을 기업이 거절하기가 참 힘들다"(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 "지원하면서 대가를 바란 적이 없다"(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무미건조한 해명이 있었을 뿐이다. 기업들이 대가를 목적으로 돈을 줬다는 점, 즉 뇌물공여를 입증하려 했던 의원들은 총수들의 철벽방어에 막혀버렸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식의 '원님재판'을 한 의원들의 무능 탓이 크지만 무엇보다 이번 사건에서 뇌물죄 적용이 매우 어려운 상황임을 방증한다.

가관인 건 의원들이 총수들에게 '앞으로 정경유착을 하지 않겠다' '전경련을 탈퇴하겠다'는 다짐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다고 정경유착이 없어질까. 검찰 공소장에도 나와 있듯이 기업은 현재로선 '범죄자'가 아닌 갈취의 '피해자'다. 기업은 대통령이 불러서 만났고 '부탁'을 받아 돈을 낸 것뿐이다. 기업이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돈과 특혜를 주고받는 '딜'을 시도한 흔적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정경유착 근절에 앞장서라는 말은 대기업 관계자들의 항변을 빌리면 "길을 가다 건달에게 걸려 '삥'을 뜯긴 사람에게 왜 뜯겼냐고 따지고 다시는 뜯기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는 격"이다.

혹자는 기업이 정녕 깨끗하면 '노(No)'라고 말하라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다. 우리나라 기업인이 배임죄보다 더 무서워하는 게 '괘씸죄'다. 유신이나 5공 같은 권위주의 시대 때 얘기가 아니다. 양정모 회장의 국제그룹은 정권에 돈을 적게 냈다가 1985년 공중분해됐다. 좌파 성향 영화를 만들었다고 쫓겨난 이미경 CJ 부회장이나 최순실 일당의 이권개입에 걸림돌이 됐다 해서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해고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보면 권력의 전횡은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기업은 성금, 기부금 등으로 '보험'부터 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1988년 일해재단 청문회 이후에도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1997년 '세풍(稅風) 사건', 2002년 '차떼기 사건' 등 정경유착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기업들은 그때마다 정경유착 근절을 약속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북지원사업, 동반성장, 미소금융과 현 정부의 창조경제혁신센터, 청년희망펀드 등 역대 정권의 합법적인 기업 삥뜯기도 이어지고 있다. 권력과 정치권의 행태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치권의 힘은 여전히 막강하다. 각종 인허가.규제권에 검찰 수사, 세무조사, 공정위 조사 등의 칼을 휘두른다. 특정 기업을 도와주기는 어려워도 해코지하는 건 일도 아니다. 28년 사이 우리나라 경제는 10배로 성장했고, 우리 기업의 위상도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기업에 손 벌리는 '수금통치'의 후진적 관행은 달라진 게 없다.

재벌청문회 같은 '정치쇼'는 백날 해봤자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통치권력이 갑질을 하지 못하도록 권력분산을 하는 정치개혁과 규제개혁이 우선돼야 한다. 불합리한 준조세를 제한하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재벌개혁은 그다음이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