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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돈 달라는데 버틸 기업 있습니까] 정권의 세무·사정 칼날 앞에.. 기업은 ‘乙’이었다

(3)반세기 이어진 ‘기업 삥뜯기’
기업들의 목줄 쥔 정치권력 인허가권.법인세 등 무기로 기업을 ‘개인 돈줄’로 이용
괘씸죄 걸릴라 순응한 기업.. 검은 유착 아직까지 못끊어

[권력이 돈 달라는데 버틸 기업 있습니까] 정권의 세무·사정 칼날 앞에.. 기업은 ‘乙’이었다

"처음에는 부담없이 냈고, 2차 모금은 내는 게 맞겠다 해서 냈다. 그다음부터는 그냥 내는 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냈다."(1988년 5공 비리 청문회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기업은 정부 정책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법으로 막아 달라."(2016년 12월 6일 최순실 게이트 청문회에서 구본무 LG 회장 및 허창수 GS 회장)

지난해 12월 6일 열린 최순일 게이트 관련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는 28년 전 5공 비리 청문회 당시 일해재단 모금사건의 판박이였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가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사실은 정치민주화에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반세기 한국 정치와 경제사에서 각종 이권을 쥔 정치권력들은 기업을 '돈줄'로 봤고, 이 때문에 '검은 유착'도 악순환을 반복했다. 정치권력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기업과의 '갑을 관계'는 국회, 검찰, 경찰, 세무당국, 각종 인허가권을 쥔 행정당국 등 입법·사법·행정에 걸친 공권력의 막강한 힘의 논리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세기 이어진 '기업 삥뜯기'

관치경제로 인해 처음 정경유착 문제가 불거진 건 1956년 이승만 정권 시절 은행 민영화 특혜사건부터다. 이승만 정부 시절 부실은행이던 한일.상업.조흥은행을 삼성이 인수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질타를 받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아웅산 폭탄테러 유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한 일해재단 모금사건은 대표적인 '기업 삥뜯기' 사례로 남아 있다.

전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위해 일해재단은 3년간 정권 실세를 동원해 대기업들로부터 598억원을 걷었다. 당시 재계 1위였던 현대그룹의 총수 정주영 명예회장은 기금 모금액이 200억원을 넘자 "내는 게 편하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냈다"고 증언했다.

지난 1990년대는 한보 비리, 세풍 사건, 김현철 게이트 등 기업과 대통령 친인척까지 연관된 사건이 계속 밝혀졌고, 2000년대에도 한나라당 차떼기 사건, 박연차 로비, 저축은행 비리 등은 여전히 국민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지난 2010년대에는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열린우리당의 자금책으로 지목돼 검찰 수사를 받고, 회사가 워크아웃 당하는 과정에서 로비를 폭로한 이른바 '이국철 게이트'가 유명하다. 박근혜정부에서도 각종 정부사업에 이른바 '준조세'로 불리는 대기업의 기부와 출연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현 정부 들어 기업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 출연한 774억원 외에도 청년희망펀드 880억원, 지능정보기술연구원 210억원, 한국인터넷광고재단 200억원, 중소상공인희망재단 100억원 등 각종 출연금을 내놨다.

청년희망펀드는 박 대통령이 1호 기부자로 나서 기업과 재벌 총수들을 압박했고, 또 창조경제의 핵심 사업인 창조경제혁신센터 17곳은 대기업별로 할당해 투자금을 부담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정부는 공개적으로 국책사업을 만들어 법망을 교묘히 피했지만, 사실상 '삥 뜯긴 것'과 다름없다"며 "개인 호주머니로 들어가지 않고 국가를 위해 사용됐다고 해도 이는 강제성을 띤 준조세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세무.사정 칼날 앞에 '절대 을'

기업들이 정경유착이란 비판에도 정부나 정치권력의 강압적 요구를 거부하기 어려운 건 무엇보다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유통분야 A그룹의 국세청 담당 출신 임원은 "5년 전쯤 중소협력사 판매수수료를 낮추라는 동반성장위원회의 권고를 듣지 않았다가 정부로부터 세무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경고를 들은 적이 있다"며 "결국 내부에 보고해 판매수수료를 낮추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고 털어놨다.

지난 2015년에는 다음카카오가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를 받아 논란이 됐다. 불과 1년 만에 세무조사를 다시 받게 되면서 정권에 비우호적인 '포털 길들이기'라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세월호 참사 등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던 시점마다 국세청의 세무조사가 있었다"고 트위터를 통해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현 정부 들어 대기업에 대한 세무조사는 강화됐다. 박근혜정부 초기인 2013년 매출 5000억원 이상 법인에 대한 세무조사는 146건이었지만 다음 해인 2014년에는 205회로 급증했다.

각종 사업 인허가 시 불이익도 기업들이 정권에 순응하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롯데그룹의 숙원사업인 제2롯데월드 건립이 대표적이다. 김영삼정부 때부터 추진했던 제2롯데월드 사업은 이명박정부 들어 경기 성남 서울공항 활주로 변경을 통해 인허가를 받으면서 각종 로비 의혹이 제기됐지만 드러난 실체는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롯데는 싱크홀 사건 등 수많은 걸림돌에 부딪히면서 각종 안전검사와 영향평가 등으로 당초 작년 말 개장하려던 계획이 연기됐다.

국회의 무리한 민원이나 압박도 기업들에 대한 '갑질'의 대명사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도 야당 국회의원은 이재용 삼성 부회장과 정진행 현대차 사장에게 노동 문제를 지적했고, 신동빈 롯데 회장에게는 경기 파주 쇼핑몰 영세상인 문제를 제기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B에너지기업 국회 대관 담당자는 "지역구 행사 지원이나 기부금 출연 등 국회의원들의 각종 민원이 일년에 수십건은 된다"며 "행여 거부하거나 비우호적 태도를 보이면 국정감사 증인 채택 등으로 압박하기 일쑤"라고 전했다. 이 담당자는 "솔직히 법인세 인상 등 기업의 생사 여탈권을 쥔 입법권을 행사하는 국회의원들은 '갑중의 갑'"이라고 꼬집었다.

cgapc@fnnews.com 최갑천 김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