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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노조에 갇힌 文정부

진보정권에 노조 청구서 봇물.. 盧정부는 파업에 국정동력 꺾여
노·정 관계의 첫 단추 잘 꿰야

[이재훈 칼럼] 노조에 갇힌 文정부

노동 친화적이라고 자처하는 진보정권에서도 노·정(勞政) 관계가 결코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외환위기 직후 탄생한 김대중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로 정리해고 도입 등 노동개혁과 공기업 개혁 등을 추진해야 했으니 노정이 서먹서먹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정부의 노.정은 초기에 극한대립을 거친 후 임기 내내 냉랭한 관계를 지속했다. 지금도 많은 노동계 인사들이 그 시절을 노동 암흑기로 기억하고 있다. 그 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 5년 동안 경제계와 노동계 간 힘의 균형을 이루겠다"며 대놓고 친(親)노동을 표방했다. 그러자 취임 첫 해인 2003년 봄 노동계의 요구가 폭발했다. 화물연대와 철도노조가 두 차례 파업으로 최악의 물류대란을 야기했고 전교조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을 거부하며 연가투쟁을 벌였다. 특히 화물연대는 노 전 대통령의 방미기간 중 파업을 감행해 발목을 잡았다. 노 정부는 파업 초기에 적극대응을 하지 않고 노조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미온적인 정부대응에 여론이 악화되고 노 정부의 지지율은 급전직하했다. 게다가 도를 넘는 노조 행태가 계속 이어지자 노 정부는 결국 강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5월 한 간담회 자리에서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이러다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우군이라 생각한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자신을 궁지로 몰자 분노를 표시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급기야 "나라가 있어야 노조가 있는 것" "노조가 귀족화.권력화하는 부분이 있다"며 노동계를 비판했다. 이후 정부는 철도노조 농성을 강제진압하는 등 '법과 원칙'에 따른 대응에 나섰고 노.정 간 대화는 단절됐다. 노 전 대통령은 '노사관계 로드맵'과 비정규직 보호법을 노동계 반대 속에 어렵사리 밀고가야 했다.

2003년 민정수석으로 노.정 갈등의 중심에서 고군분투했던 사람이 문재인 대통령이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참여정부의 노.정 관계는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고 개혁 역량을 손상시킨 측면이 크다"며 실패를 인정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진보정권이 탄생했고 노동계는 새 정부에 요구사항을 봇물처럼 쏟아내고 있다. 촛불시위를 주도하고 문 대통령을 지지했던 양대 노총이 '청구서'를 내미는 모양새다. 이제 문 정부의 노.정 관계가 기로에 섰다.

민주노총이 대통령 취임 50일 만에 이른바 '사회적 총파업'에 나섰다.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등 정부가 추진 중인 정책을 더 빨리 하라며 재촉하는 것이라는데 정부와 기싸움을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 한국노총은 "문 대통령 승리의 주역인 노동계를 장식물로 보지마라"며 정부를 윽박질렀다. 정부는 한노총의 요구에 따라 철도시설공단의 통합, 코레일과 수서발 고속철(SR)의 통합을 검토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한꺼번에 다 받아내려 하지 말아달라" "1년 정도 시간을 달라"고 당부했으나 노동계는 "칭기즈칸의 속도로 개혁을 몰아붙여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정부는 민노총의 불법파업을 뒷짐지고 바라보고 있다. 분명한 것은 노동 문제와 관련해 정부는 노사 간 중간조정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가 노조에 포획돼 일방에 치우친 정책을 펴게 되면 국정 동력은 추락할 게 뻔하다. 문 대통령이 후회한 2003년 노.정 충돌의 교훈이 그것이다. 문 대통령이 실패를 되풀이해선 안된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