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s+ Culture]

'대학살의 신'으로 6년만에 연극무대 서는 배우 최정원

"연극은 '산삼' 같아요 쓴맛 있지만 묘약이지요"
연극 '대학살의 신'서 아네트役.. 남경주·송일국·이지하 등 출연
연극이 공연되는 1시간30분 동안 4명의 배우 모두 퇴장 없이 연기

"뮤지컬이 앙상블들이 어시스트해준 공을 받아 골을 넣고 박수받는 거라면, 연극은 골대 앞까지 제 스스로 공을 끌고가서 골을 집어넣어야 해요. 노래 때문에 뮤지컬이 더 어렵지 않냐 하는데, 비어있는 공간과 시간을 연기로만 채우는 게 사실 더 어렵죠. 노래할 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어요. 가사와 리듬에 몸을 맡기면 되니까. 연극은 연기 외에 기댈 곳이 없어요. 연극을 하다 보면 제 부족함을 더 많이 발견하게 돼요. 그래도 늘 갈망해요. 누워있어도 떡을 먹을 수 있지만 산삼은 산에 올라가야 먹을 수 있으니까요. 일상 속에서 약해졌던 어떤 부분들을 다시 채울 수 있는 보약 같은 게 저에겐 연극이었어요."

내년이면 무대에 선지 30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좋은 배우밖에는 다른 꿈이 없다는 그다. 끊임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는 배우 최정원(48)이 6년만에 연극 무대에 섰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대학살의 신'을 통해서다. 그간 뮤지컬 무대에서 공백없이 존재감을 발휘해온 그가 연극 무대를 찾게 된 것은 일상의 밥이 채우지 못하는 어떤 것, 쓴맛도 있지만 먹고 난 뒤에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동력을 더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빼죽한 돌이 깎여 둥글고 유연한 돌이 되어가듯이 배우라는 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래야할 것 같다"고 입을 연 그는 "예전에는 책임감보다 무대에서 내가 즐기는 것이 더 중요했는데 나이가 들고 또 이 작품을 통해서 매일매일 새롭게 배워가는 것들이 있다"고 말했다. "몰입도 좀 더 많이 해야 하고요. 제가 그 동안 가지고 있던 테크닉적인 부분들을 다시 내려놓고 다시 다듬어가는 마음으로 연극을 하고 나면 그 다음 작품을 할 때 좀 더 쉬워지는 부분도 있더라고요. 때론 뮤지컬의 스토리보다 더 복잡한 부분들이 있어서 이렇게 저렇게 생각도 더 많이 하게 되고 공부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특별히 그는 이번 작품이 다시 무대에 오르기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 역시 연극 무대에는 6년만의 귀환이지만 이 작품 역시 2011년 후 6년 만에 연출부터 배우 모두 새로운 캐스팅으로 무대에 섰다.

연극 작품마다 각각의 특징이 있지만 유독 이 작품은 배우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작품이다. 연극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끝나는 1시간30분 동안 퇴장이 없기 때문이다.

쉴틈없이 4명의 배우가 말과 말을 서로 잡으며 흐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긴장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2010년에 초연으로 무대에 올랐던 이 작품을 봤는데 배우의 호흡에 따라 달라지는 그 템포감, 대사 속에서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철학적인 부분들이 매력적이었어요. 웃기려고 작정한 대사가 아닌 대사를 주고 받는 중에 발생하는 상황적인 부분에서 나오는 웃음 포인트도 좋고. 그래서 기회가 되면 이 작품을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멤버가 참 완벽한 것 같아요."

자녀의 싸움에 화해하려고 만난 두 부부가 고상한 척 위선적인 말을 주고 받다 결국엔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이성을 주체하지 못한 채 다툼을 벌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연극에서 그는 배우 인생의 콤비라고 불리는 남경주와 부부 역할로 나온다. 상대 부부 역은 송일국과 이지하가 맡았다. "이번 연극에 캐스팅된 사실을 남경주 배우와 거의 동시에 알게 됐다"는 그는 "부부로 나오는 역할이어서 이래저래 생각하다 보니 지난 30여년 가까이 남경주 배우와 연인도 해보고 헤어진 부부 역할도 해봤지만 결혼생활 중인 부부로 만난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돼 신기했다"고 했다.

초반에는 잔잔하게 시작하는 연극이 끝을 향해 가면서 격렬해진다. 직업을 묻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새 말꼬리를 잡게 되고 논쟁이 벌어지게 된다. 극 중간에서 끝을 향해 고조시키는 결정적인 장면은 최정원이 맡은 아네트가 구토를 하는 부분이다.

고상한 변호사의 아내로 매너를 갖추려 노력하지만 가식이라 비난받고 불편한 상황 속에 고삐가 풀리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한 달여 가까이 매일의 공연에서 최정원은 이 상황을 반복해야 한다.

그는 이에 대해 "이번 역할의 핵심은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적정선에서 부글부글 끓는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며 "초반에 차분해 보이는 가운데 감정을 절제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지만 이 장면 이후 점차 고삐풀린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릴렉스가 되고 극 후반에는 스트레스마저 날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매일 공연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고 오히려 충전될 수 있게 되는 비법이 여기에 있는 셈이다.

"공연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공연 안에서 풀어내는 것 또한 배우로서 필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커튼콜이 힘들지 않냐고 많이 묻곤 하는데 저는 오히려 관객의 박수를 받으면 재충전이 돼 바로 또 연극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공연을 하고나면 몸이 오히려 개운하고 행복한 것이 천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30년 가까이 무대에 서면서 다른 삶을 꿈꿔본 적은 없을까. 그의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다. 심지어 연출이나 제작자로의 전환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저는 배우가 아니었으면 아예 공연계에 있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직도 배우로서 해야할 것들이 많다는 생각을 해요. 박정자 선배를 볼 때도 그렇고. 더욱 깊게 파고 공부하고 채워야 할 것들이 넘쳐나서 다른 데 눈을 돌릴 생각은 전혀 안들어요. 앞으로 계속 나이를 먹어가겠죠. 할리우드 고전영화 '선셋대로'의 주인공처럼 환상 속에서 젊고 화려했던 시절만 그리고 싶진 않아요. 제게 주어진 배역에서 표현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을 뿐이죠. 아! 그런데 악역에는 좀 더 도전해보고 싶어요."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