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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영 칼럼] 남한산성은 안에서 무너졌다는데

"우리끼리 싸우는 데 귀신, 외적과 맞서는 데는 등신"
외적보다 분열 더 경계할 때

[구본영 칼럼] 남한산성은 안에서 무너졌다는데

며칠 전 병자호란이 배경인 영화 '남한산성'을 봤다. 김훈의 소설이 원작이다. 청의 장수 용골대와 역관 정명수가 성 앞에서 수작을 부리는 장면이 퍽 인상 깊었다. 용골대가 "성벽이 날카로워 깨뜨리기 쉽지 않겠구나"라고 하자 조선 노비 출신의 정명수는 "바싹 조이면 안은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당시 막강 군사력의 청이 명의 숨통을 거의 끊어놓고 조선을 조여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정은 나라를 지킬 방비도, 결기도 다져놓지 못했다. 청의 기마부대가 국경을 넘어 한양까지 휘몰아칠 때 관군은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않았다. 반면 국사를 논하는 편전 안은 말(馬) 아닌 말(言)이 일으키는 먼지만 자욱했다. 구원병을 보낼 능력도, 의지도 없는 명에 대한 의리를 놓고 명분을 다투는 소리만 악머구리 끓듯 했다.

청의 신무기인 홍이포의 위력은 영화 속에서도 대단했다. 인조가 머물던 행궁 지붕으로 불벼락이 떨어지자 주화파와 척화파 간 부질없는 설전도 끝났다. 이후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와 치욕스러운 항복을 한 것은 한 치의 픽션도 섞이지 않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제 청의 홍이포와는 차원이 다른 북한의 핵.미사일과 맞닥뜨릴 참이다. 김정은 정권으로선 핵무장을 마법의 절대반지로 여길 법하다. 세습체제를 지키고 잘하면 미국과 협상해 주한미군 철수라는 비원도 이룰 카드라고 말이다. 반면 우리에겐 악몽이다. 북핵의 인질이 되는 순간 남한이 주도하는 자유민주주의 통일은 멀어지고 북한에게 속된 말로 '삥 뜯기며' 사는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어서다.

물론 핵 보유를 통해 적화통일을 하려는 북한 정권의 기대는 한낱 미망일 수 있다. 다만 핵무장한 북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소망적 사고' 또한 큰 문제다. 북한 노동신문이 얼마 전 "서울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는 군사적 옵션이 있다"는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의 주장을 일축했다. "조선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 전역이 쑥대밭 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다. 문재인정부가 아직도 북핵은 협상용이라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의 안이한 인식에 갇혀 있어선 곤란하다.

북핵에 대응하는 삼박자 옵션은 대화와 제재 그리고 억지다. 우선 강력한 제재로 북핵 폐기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억지 능력을 갖춰야 한다. 어느 하나가 빠져도 핵 인질 상태에서 헤어날 수 없다. 대한민국이 북핵의 공포에서 졸업하려면 3과목 모두 전공필수로 이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 내부는 이를 놓고 갑론을박만 한창이다. 일찍이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는 독일 나치 정권에 맞서 "평화는 구걸한다고 보장되지 않고 지킬 힘이 전제돼야 한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는 얼마 전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유럽국도 하는 미국과의 전술핵 공유는 안 된다고 했다. 언제 찢어질지 모르는 미국의 핵우산에 마냥 의존하겠다는 건지, 핵 인질이 되는 상황에서 북의 선의에만 기대겠다는 건지 도시 이해하기 어려웠다.

47일간의 농성 뒤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땅에 이마를 아홉 번 찧은 인조는 한탄했다.
"나라는 스스로 기운 뒤에야, 외적이 와 무너뜨린다"고. 국력도 키우지 못하고 내부 분열까지 보탠 무능을 뒤늦게 자책한 꼴이다. 지금은 북 핵.미사일 앞에서 숨어들 남한산성도 없다. '우리끼리 싸우는 데는 귀신, 외적과 맞서는 데는 등신'이라는 자조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