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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자수첩]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7년 어느 날 엄마는 봉투에 얼마를 넣을지 한참 고민했다. 같은 반 친구에게 줄 봉투였다. 친구네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사업이 부도 나 어려운 형편에 빠져 있었다. 학교는 전교생으로부터 십시일반 기부금을 모아 친구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지폐 몇 장이 든 봉투는 왠지 무겁게 느껴졌다.

묻혀 있던 기억을 떠올린 건 지난 21일 한국경제연구원이 주최한 '외환위기 극복 20년 특별대담'을 듣고 나서다. 그동안 내게 외환위기는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현재 한국은 세계 9위 수준의 외환보유액을 자랑한다. 1997년을 떠올리면 외환위기보단 TV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당시 기억을 잊은 나와 달리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에게 위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외환위기 극복을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했던 그는 특별대담에서 "'IMF 사태 졸업'은 우리에게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전 장관은 고도성장 신화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외환위기가 일어났다면서 "흥청망청했던 시대로 돌아간다면 IMF 사태는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다"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현재의 성과에 취한다면 IMF 사태와 같은 위기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외환위기는 하루아침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 임금체불액 등 위기를 알리는 경고등이 깜빡였는데도 대처하지 못했던 건 '안주' 탓이었다.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아시아의 용'으로 불리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 경제를 앞지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그 가운데 위험을 알리는 신호는 묻혔다.

어쩌면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반도체 호황'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20년 전 기억과 단절돼 있다. 반도체 사이클에 대한 취재 과정 중 한 증권사 연구원은 "지금 한국 경제에 반도체 빼면 뭐가 남을 것 같으냐"며 "반도체 호황기가 끝나면 어떻게 될지 두렵기만 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는 내년 하반기면 호황기가 저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 10월 반도체는 전체 수출의 21.1%를 차지했다.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삼성전자의 올해 3.4분기 영업이익 70%가 반도체에서 나왔을 만큼 쏠림현상이 심각하다. 반도체 실적에 흥청망청하다간 IMF 사태 졸업은 요원하다는 구관(舊官)의 조언이 귓가에 맴도는 이유다.

ktop@fnnews.com 권승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