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

[전선익의 재팬톡!]‘파칭코 왕국’日, 파칭코에서 헤어나다

- 일본의 그림자를 비춰보다.④
- 아침부터 파칭코 가게 앞에서 줄서 있는 사람들
- 어린이 놀이 ‘가챵코’가 패전 후 오락 ‘파칭코’로 변화
- 낮은 집입장벽, 비과세로 큰 인기
- 세대교체 이뤄지며 ‘사행성 오락’ 인식 높아져 쇠퇴기 돌입
- 日정부, "국가 이미지 위해 규제 강화", 업계 "국영 카지노 산업 위해 희생양"

[전선익의 재팬톡!]‘파칭코 왕국’日, 파칭코에서 헤어나다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신주쿠역 파칭코 가게 앞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 /사진=fnDB
【도쿄=전선익 특파원】12월 4일 오전 8시 30분. 쌀쌀해진 도쿄의 아침 날씨 때문인지 도쿄도 신주쿠역 근처 파칭코 가게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검정 코트를 걸쳐 입고 있습니다. 아침 찬바람을 이기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깃을 세우고 서 있는 사람들. 출근하기 위해 멀끔히 차려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직장인들과 대조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아침부터 줄을 서게 만드는 걸까 궁금해 줄을 서있는 50대 남성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좋아하는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서 아침 7시 반부터 줄을 섰다”고 퉁명스레 답을 합니다.

일본 도쿄에서 상대적으로 큰 역 주변을 걷다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파칭코 가게입니다. 파칭코 가게의 영업시간은 지역별로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오전 8~9시 사이에 개점해 밤 11시까지 영업을 합니다.

김용안 저자의 ‘키워드로 여는 일본의 향’에 따르면 파칭코는 사실 2차 세계대전 당시 ‘가챵코’라고 불리던 어린이들의 놀이도구였습니다. 그것이 전쟁이 끝난 후 일본 나고야지역에서 쓸모없어진 군수용품 부품(베어링, 알루미늄판 등)들을 활용한 ‘파칭코’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1946년 나고야에서 시작된 ‘파칭코’는 패전 후 딱히 ‘오락(레저)’라 부를 것이 없던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도박 중독’, ‘가정 파탄’, ‘빚’이라는 연관 키워드를 동반한 파칭코를 일본인들은 아직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전선익의 재팬톡!]‘파칭코 왕국’日, 파칭코에서 헤어나다
이종범씨가 MBC '세바퀴'에 출연해 일본 파칭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진=MBC 캡쳐 화면
파칭코는 일본에서 합법인 사행성 오락입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여가 시간에 즐기는 ‘레저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 이종범씨는 지난 2011년 MBC 프로그램에 출연해 “지도자 연수를 위해 일본에서 살 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파칭코’를 즐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대중적인 오락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일본에서 파칭코에 빠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그중에 가장 큰 이유는 낮은 초기 비용입니다. 다른 여가에 비해 적은 금액으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엔, 5엔, 10엔 등 초기 금액을 아주 낮게 설정해 놓은 파칭코도 많아 진입장벽이 거의 없는 셈입니다. 파칭코 업계에서는 “쵸이 파치(ちょういパチ, 가볍게 즐기는 파칭코)” 라는 뜻의 신조어가 등장해 화제가 된 적도 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과세가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경마나 경륜과 같이 국가에서 지정한 도박이 아니기 때문에 파칭코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50만엔이 넘지 않는 이상 과세가 되지 않습니다. 파칭코는 ‘풍속영업 등의 규제 및 업무의 적정화 등에 관한 법률(風俗営業等の規制及び業務の適正化等に関する法律)’로 규정돼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도박이 아닌 성인 놀이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신주쿠에 위치한 파칭코 가게의 한 점원은 “엄밀하게는 50만엔 이상 소득이 넘어갈 경우 임시 소득에 적용돼 신고의 의무가 생기나 모두 점포 내 현금거래로 이뤄져 사실상 과세를 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전선익의 재팬톡!]‘파칭코 왕국’日, 파칭코에서 헤어나다
일본 파친코 [연합뉴스 자료사진] /사진=연합뉴스
공공재단법인 일본생산성본부가 지난 7월 발표한 ‘레저백서 2017’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파칭코를 즐기는 사람은 전년 동기 대비 130만명 감소한 940만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연간 파칭코에 가는 횟수는 평균 32.4회에서 29.8회로 평균 비용 또한 9만9800엔(한화 약 96만원)에서 8만8900엔(약 86만원)으로 횟수와 비용 모든 측면에서 감소했습니다. 시장규모 또한 2015년의 23조2290억엔(약 225조7069억원)에서 6.9% 감소한 21조6260억엔(약 210조1117억원)으로 크게 감소했습니다.

일본 경찰청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조사한 결과, 파칭코 점포 수도 하락세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2012년 1만2149개였던 점포수는 지난해 1만986개로 파칭코 산업이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파칭코 문화가 사라져가는 가장 큰 이유는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파칭코를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파칭코 외에 특별히 할 게 없던 기성세대들과 달리 할게 넘쳐나는 젊은 세대들은 도박성이 짙은 파칭코를 기피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의 규제 또한 인식의 변화에 한몫을 합니다. 일본 경찰청은 지난 8월 도박중독증의 대책으로 파칭코의 구슬과 슬롯의 메달 획득 수를 현행의 3분의2로 낮추는 개정안을 공표했습니다. 내년 2월1일부터 실시되는 개정안은 오락시간을 4시간으로 상정하고 획득 가능한 구슬 수를 규제함과 동시에 잭팟(Jackpot) 구슬 수도 2400개에서 1500개까지 대폭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개정안이 실행되면 이용자의 최대 수익(4시간 기준)이 5만엔(약 48만원)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전선익의 재팬톡!]‘파칭코 왕국’日, 파칭코에서 헤어나다
카지노 슬럿머신/사진=연합뉴스
이같은 개정안을 놓고 일본내에서는 찬반여론이 뜨겁습니다. “예전처럼 건전한 대중오락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객들이 떠나는 파칭코 문화를 죽이게 되는 결과”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국가가 ‘국영 카지노 산업’을 키우기 위해 야쿠자를 중심으로 민간에서 운영되고 있는 ‘파칭코 산업’을 죽이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감소했다고 해도 20조엔(약 194조원)이 넘는 파칭코 시장을 국영 카지노 산업으로 유입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 경찰청은 표면적으로 “도쿄 올림픽에 맞춰 국제적 이미지가 나쁘게 될 수 있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너무도 생소한 ‘파칭코' 왕국 일본. '카지노' 왕국으로의 꿈을 꾸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sijeon@fnnews.com 전선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