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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기업하고 싶은 나라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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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오징어 수출하던 나라가 반도체.시추선도 척척 만들어
소득 3만불 시대 주역도 기업.. 기업 기가 살아야 경제도 살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인가. "가발과 오징어, 텅스텐을 수출하던 가난한 개발도상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휴대폰, 심해저 시추선까지 척척 만들어내는 나라로 탈바꿈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대학교 공대 교수들이 공동저서 '축적의 시간'(2015년)에서 내린 평가다. 하지만 그런 대한민국이 고장 났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산업군과 기업이 생겨나지 않아서 성장이 정체되고, 일자리의 질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축적의 시간'에서 교수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시간을 들여 경험과 지식을 쌓고 숙성시키자"고 말한다. 거기서 부가가치가 높은 핵심기술과 창의적 개념설계 역량이 나온다는 것이다.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다. 수백년 산업화에 앞선 선진국들은 이미 그러한 경험을 활용하는 데 능하다. 우린 이제 시작이다.

경험과 지식을 쌓아 대한민국이라는 수레바퀴를 다시 돌릴 최상의 전략은 무엇일까. 우리는 기업을 자유롭게 놓아줄 것을 제안한다. 제조업체도 놓아주고 은행도 놓아주자. 자본주의에서 부를 창출하는 주인공은 단연 기업이다. 기업은 일자리를 만들고 세금을 낸다. 정부가 아무리 기를 써도 기업만큼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기업을 옥죄는 데만 힘을 쓴다. 박근혜정부는 기업을 주머닛속 공깃돌처럼 여기다 된통 당했다. 그 통에 몇몇 기업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렀다. 문재인정부도 기업을 보는 눈이 곱지 않다. 특히 대기업이 그렇다. 법인세율을 최고 22%에서 25%로 올린 것을 보면 안다. 무엇보다 타이밍이 좋지 않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와 의회는 법인세율을 최고 35%에서 21%로 뚝 떨어뜨렸다. 우리보다 4%포인트 낮다.

한번 생각해 보라. 당신이 기업인이라면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짓고 싶겠는가. 원래 미국 같은 선진국은 세율이 높은 편이다. 그래도 자본 투자가 끊이지 않는다. 시장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신흥국들은 전통적으로 낮은 세율이 무기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역전됐다. 세상 최강국 미국의 법인세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2%를 밑돈다. 영국.일본 같은 나라들도 세율 인하에 동참했다. 우리만 거꾸로 간다.

중소, 영세 기업들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문재인정부는 중기인들의 여망을 담아 중소벤처기업부를 신설했다. 문 대통령은 작년 11월 말 중기부 출범식에서 "문재인정부의 핵심 부처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런 문재인정부가 중기와 영세상인들로부터 원성을 듣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두말할 나위 없이 그것은 최저임금을 비현실적으로 대폭 올렸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는 중기와 영세상인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선순위를 보면 노조에 밀린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거창한 목표에도 눌린다. 이런 판에 근로시간 단축이라는 시한폭탄까지 재깍거린다. 중기는 이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몰라 속이 타들어간다.

고용노동부가 파리바게뜨를 다루는 모습을 보면 현 정부의 짙은 반기업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어느날 갑자기 수천명 제빵사를 직접고용하라니, 어떤 기업이 이런 지시를 감당할 수 있을까. 고용부는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다고 과태료까지 물렸다. 파리바게뜨 사태는 파견법이 가진 한계를 드러냈다. 파견법은 32개 업무에 한해 파견근로를 허용한다. 제빵사는 여기서 빠진다. 따라서 파리바게뜨 본사 직원이 제빵사한테 업무지시를 내리면 불법이다. 법을 지키려면, 파리바게뜨는 제빵사가 고용된 협력업체에 연락해서 협조를 구하고, 그 협력업체가 제빵사에게 지시를 내려야 한다. 한시가 급한 생산 현장에서 이런 불합리가 또 있을까. 그런데도 고용부는 파견법의 맹점엔 눈을 감았다.

기업을 옥죄는 일은 금융업도 예외가 아니다. 금융당국이 은행을 마치 산하기관인 양 취급하는 관행이 여전하다. 이게 관치다. 금융지주사 회장들의 '셀프 연임'에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관치 폐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한국 경제의 약점 중 하나는 제조업과 금융의 비대칭 성장이다. 제조업에선 일류 기업이 꽤 나왔지만 금융엔 내로라할 상업은행도 투자은행(IB)도 없다. 은행들이 관치 중량감에 짓눌린 나머지 날개를 활짝 펼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에 자율 특효약을 주지 않는 한 '금융의 삼성전자'는 요원하다.

1983년 한국은 반도체 신화에 첫발을 디뎠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D램을 만든다는 소식에 일본 미쓰비시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조롱 섞인 보고서를 냈다('축적의 시간'). 그로부터 9년 뒤인 1992년 삼성전자는 D램 시장에서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섰다. 문제는 지금이다. 수십년째 삼성전자에 견줄만한 기업이 나오지 않았다. 삼성전자의 성공 스토리 뒤에는 전자공학이 있다. 한 세대 전 한국의 수재들은 줄지어 전자공학과로 진학했다. 요즘 수재들은 죄다 의대로 간다. 하지만 의료산업은 규제 그물로 칭칭 감겨 있다.

기업이 맘껏 뛸 수 있게 놓아주자. 일자리정부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기업에서 일자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오징어를 수출하던 나라가 휴대폰을 척척 만드는 나라가 됐다. 장차 인공지능(AI).자율주행차 같은 4차산업에서도 한국 기업이 선두에 설 수 있다. 새해부터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활짝 열린다.
그 주역도 기업이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이 열개, 스무개는 더 나와야 한다. 기업의 기가 살아야 경제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