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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사설] 생산적 금융, 기술금융과 뭐가 다른가

은행을 쥐어짤 게 아니라 투자은행 제대로 키우길

금융당국이 21일 은행 자본규제 개편안을 내놨다. 가계대출을 줄이고 기업대출을 늘리는 게 목적이다. 이를 위해 당국은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 계산법을 손질했다. BIS 비율은 은행 건전성을 재는 국제기준이다. 일정 비율을 밑돌면 은행은 제재를 받는다. 앞으로 가계에 돈을 꿔주면 BIS 비율을 계산할 때 불리하다. 반대로 기업에 돈을 꿔주면 유리하다. 금융위원회는 이렇게 해서 돈의 물줄기를 비생산적 가계대출에서 생산적 기업대출로 바꾸고 싶어한다.

하지만 돈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에 시중은행들은 주로 기업대출을 취급했다. 가계대출은 당시 국민은행(현 KB국민은행)이 따로 맡았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부실기업에 앗 뜨거라, 덴 은행들은 기업대출을 외면했다. 대신 연체율이 낮고 관리가 쉬운 가계대출에 몰두했다. 그 결과물이 1420조원(2017년 9월 기준)에 이르는 천문학적 가계빚이다.

정부가 가계대출을 줄이려 힘을 쏟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방식이 문제다. 문재인정부가 말하는 생산적 금융은 박근혜정부가 편 기술금융 정책을 연상시킨다. 당시 신제윤 금융위원장이 총대를 멨다. 중소기업.벤처에 대출을 많이 하면 은행 평가 때 높은 점수를 줬다. 하지만 은행들은 시늉만 했다. 원래 중기.벤처로 갈 돈을 기술금융으로 분류만 바꿔서 보고했다. 은행은 돈벌이가 되면 뜯어말려도 대출한다. 돈이 안 되면 매질을 해도 회수한다. 그런데 정부는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려 한다. 21일 금융위는 은행을 평가할 때 '중기 신용대출 지원실적'을 새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문재인정부판 기술금융에 다름 아니다.

자본규제 개편은 정공법이 아니다. 돈줄기를 기업, 특히 중기.벤처 쪽으로 바꾸려면 환경 조성이 먼저다. 애당초 은행은 중기.벤처 대출이 주특기가 아니다. 그런 일은 벤처캐피털이나 투자은행(IB)이 전공이다. 국내 벤처투자 생태계는 열악하기 짝이 없다. 서울대 현택환 교수(공대)는 "젊은 교수들이 벤처를 하겠다고 하면 극구 말리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한국에는 대부업체들만 있지 진정한 의미의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이 없다"('축적의 시간')는 게 현 교수의 주장이다. 모험투자에 능한 투자은행도 십수년째 '한국판 골드만삭스' 슬로건만 요란하다.

기업대출을 늘리려면 부실기업의 신속한 정리도 필수다. 그래야 은행이 부담을 덜 수 있다.
그러나 문재인정부의 구조조정은 벌써 길을 잃었다. 연초 문 대통령이 첫 현장 방문지로 대우조선을 찾았을 때 시장은 이미 알아차렸다. 이래서야 생산적 금융으로 돈이 흐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