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논단]

불안과 기대가 상존하는 '해빙의 시기'


남북한 관계가 극적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주변국들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지고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정말 70여년의 긴 분단을 청산하고 통일로 가는 한발을 내딛는 것일까. 사뭇 기대가 크다. 하지만 워낙 단단하게 고착된 냉전구도를 걷어내고 새로운 질서를 정착시키는 일이라 그리 만만할 리 만무다. 걱정과 불안이 기대와 교차하는 것이 사실이다. 핵을 머리에 이고 일촉즉발의 분쟁구도를 견디는 것도 못할 노릇이지만 각종 돌발변수가 예측 불능으로 매복해 있는 해빙의 시절을 건너가는 마음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금 긴 역사시간 안에서 희귀하게 한 번씩 찾아오는 '시간의 목'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영영 불가역적인 변화를 역사에 새겨버리는 그런 시간 말이다. 이를테면 안시성 싸움 같은 게 그런 예다. 고구려가 그 전쟁에서 패했다면 고려와 조선의 국경은 더 아래로 내려갔을지 모른다. 임진왜란도 그런 고비다. 그 싸움에서 이순신이 바다를 지키지 못했다면 한반도의 주인은 그때 이미 바뀌었을 것이다. 더 가깝게는 미소(美蘇)의 대결구도 속에서 이승만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국체(國?)가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인구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은 정말 귀한 호재다. 지금 당장 통일하면 한국은 총인구가 7600만명가량이 되는데 해외동포 유입까지 예상해보면 인도나 중국 같은 인구대국을 논외로 할 때 미국과 일본보다는 작아도 독일을 넘보는 수준이 된다. 게다가 북한의 젊은 인구구조로 인해 통일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늦춰질 것이며 노동력 풀 또한 상당히 넉넉해질 것이다. 올해로 이미 생산가능인구(15세 이상 64세 미만)가 감소세로 돌아선 대한민국으로선 북한의 총인구(약 2600만명)와 높은 출산력(2.0대로 추정)이 그래서 퍽 믿음직하다.

하지만 통일은 만만찮은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비용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우린 북한을 도울 부담을 다른 나라들보다 많이 안을 수밖에 없다. 독일은 통일비용을 당초 국내총생산(GDP)의 1.5%로 예상했다가 실제로는 매년 4%쯤 지속적으로 지출했던 선례가 있다. 게다가 1990년 통일한 지 올해로 25년이 지난 독일을 보면 통일로 인한 일시적 호황 뒤에는 통일 후유증으로 '유럽의 병자'라는 소리까지 듣는 혹독한 시기를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한반도 통일도 독일 통일 못지않게 실보다 득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당장 통일은 아니더라도 평화공존과 경협의 틀이라도 정착되면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리스크와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될 것이고, 광범위한 사회간접자본(SOC) 투자 및 건설 붐으로 남북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다.
북한은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편입되면서 저렴한 노동력과 보유자원 덕분에 제조업 전진기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는 물론이고 남북한 당사자의 힘의 균형조차 어느 한 방향으로 쏠리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지금이 한반도 주변에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호기인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냉전적 분단구도로 회귀할 불길한 가능성은 그래서 여전히 상존해 있다.

이재인 (사)서울인구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