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회장은 자신의 책 ‘생각의 속도’에서 “1980년대가 질(質)의 시대, 90년대가 리엔지니어링의 시대라면 2000년대는 속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새로운 디지털시대에 비즈니스도 ‘생각의 속도’로 운영돼야 하며 21세기 기업의 성패는 속도가 좌우할 것임을 강조했다.
21세기는 속도가 지배
10년 전 그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음은 여러 사례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가 세계 1위로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도 속도의 힘이었다. 도요타는 매사에 신중했던 기존 일본 기업들의 전통을 깨고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신차 개발 기간을 18개월까지 줄였다. 이에 비해 미국 자동차 업체들은 신차 개발에 3년 이상 걸렸고 결국 소비자의 선택에서 멀어지게 됐다. 급기야 이번 경제위기로 제너럴모터스(GM)와 크라이슬러가 파산보호를 신청하며 소위 ‘빅3 시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삼정전자가 세계 1위 휴대폰업체인 노키아를 위협하며 시장점유율을 확대해 가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속도의 힘이다. 삼성전자는 신모델 개발 기간을 5∼6개월로 단축했다. 글로벌 경쟁사들이 12∼18개월 걸리는 것에 비하면 3배 가까이 빠른 속도다. 삼성전자는 이 같은 속도전을 통해 저가폰에서 프리미엄폰까지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며 전세계 소비자들을 공략하고 있다.
기업뿐만 아니라 선진 기술강국들도 21세기 속도전쟁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신뉴딜정책’, 일본의 ‘쿨어스(Cool Earth) 50 전략’, 유럽연합(EU)의 ‘경제부흥계획’ 등은 모두 국가연구개발사업 확대를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한 조치들이다.
기술혁신이 우리 경제의 희망
글로벌 경쟁기업과 선진 각국에 비해 자본과 원천기술에서 뒤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명해진다.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혁신역량을 동원해 지금보다 2배, 3배의 노력을 기울여 연구성과 창출과 기술 상용화를 하루라도 더 앞당기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산업기술 관련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연구개발(R&D) 속도전을 선언한 것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한국생산기술연구원을 비롯한 13개 연구기관들은 기업 경쟁력 강화의 해법을 ‘조기 상용화’에서 찾고 88개의 유망 기술을 골라 개발 기간을 1년까지 단축하기로 했다. 연구기관들이 직접 경제위기 돌파의 주역으로 나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개발 초기부터 함께 참여하는 클러스터형 R&D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각 단계별로 시간과 비용, 공정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개발된 기술을 즉시 민간으로 이전할 수 있도록 연구실을 기업 현장으로 옮기고 상용화와 마케팅까지 지원하는 총체적 R&D를 추진키로 했다.
정부도 이 같은 출연 연구기관의 노력을 최대한 뒷받침해나갈 계획이다. 정부 R&D 예산을 올해 12조원에서 2012년 16조6000억원으로 지속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신기술 개발을 위한 단기적 예산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 3월 단기 실용화 과제와 녹색 융합원천기술 개발에 3000억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한 바 있다.
예산 지원과 함께 중요한 것이 연구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다. 기술기획부터 상업화까지 전주기적 통합관리체제를 구축해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속도전 수행결과가 기관의 사업·예산에 반영되도록 평가시스템을 개편해 나갈 것이다. 특히 우수 연구원에 대해선 해외연수나 정년연장 등 다양한 인센티브도 제공될 계획이다.
기술 혁신이야말로 경제성장의 원천이고 희망이다. 더욱이 지금과 같은 ‘속도의 시대’에는 기술혁신에 한 발 앞서느냐, 한 발 뒤처지느냐가 우리 경제의 성패를 가르고 사활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난 40여년간 국가 기술혁신의 원천이 되어준 정부출연 연구기관이 이제는 ‘R&D 속도전’의 기수로 나서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의 경제 지도를 바꾸는 희망의 주역이 되어줄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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