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김장실 사장(54)의 경상도 사투리는 억세면서도 참 정겹다. 스스로 ‘불치병’이라고 말하지만 은근히 즐기는 것도 같다.
경남 남해 상주가 고향. 어릴 적 언덕 위 맨 꼭대기 집 마루에 누워 있으면 상주 앞바다서 부서지는 파도가 ‘쏴아 쏴아’ 소리를 내며 귓가를 때렸다. 아침 7시, 저녁 7시면 어김없이 여객선이 들어왔다. 그때마다 ‘비 내리던 호남선’ ‘무너진 사랑탑’ ‘삼천포 아가씨’ 이런 유행가가 확성기를 통해 온 마을에 쩌렁쩌렁 울렸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나무를 질 때나 거름을 나를 때 함께한 건 바로 이 확성기를 통해 들은 유행가였다. 그 시절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나라 공연예술계 최고 수장이지만 “클래식보다 대중가요가 더 친숙한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며 그는 웃는다.
사실 김 사장의 대중가요 사랑은 유별나다. 일단 노래 수준부터 예사롭지 않다. 인터뷰 도중 조미미의 ‘여자의 꿈’, 이미자의 ‘옥이 엄마’, 손인호의 ‘하룻밤 풋사랑’ 등 세 곡을 내리 불렀다. 반쯤 감은 눈으로 중간 중간 꺾는 음이 절묘했다.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강의에서는 스타 강사다.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시절 전남 장성군 장성아카데미 초청강의에서 우리나라 저명 강사들을 다 제치고 가장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숙명여대 언론정보학부 학생 사이에선 ‘다시 듣고 싶은 강의 1위’에 뽑히기도 했다. 민음사를 통해 출판를 앞두고 있는 ‘한국대중가요의 정치사회학’이라는 책은 그의 대중가요 담론을 총결산하는 성격이다. 그는 “시대정신을 담으면서 서민의 애환을 리얼하게 표현한 가사에선 된장 느낌이 난다”며 “호소력 있는 가수의 가창력으로 접하면 그 맛은 정말 일품”이라고 말한다.
대중가수들에게 문턱이 높았던 예술의전당이 앞으로 확 달라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신중하다. “제 개인적인 취미일 뿐이에요. 대중가요를 사랑하는 것과 예술의전당 운영 방침은 별개입니다. 대중가수들이 적극 설 수 있는 대중음악당은 새로 만들어질 겁니다. 예술의전당은 공연화 전문화계획에 맞춰 운영돼야죠.”
앞으론 오페라 아리아에도 도전해 보고 싶다는 김 사장. 최근엔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맹연습 중이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그의 말대로 어디까지나 ‘취미의 영역’이다. 그는 요즘 기업 후원을 따내는 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예술의전당이 올해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바로 오페라하우스 토월극장 리모델링과 음악당 체임버홀 신설사업. 현재 2층 691석 규모의 토월극장은 약 250억원을 들여 3층 1030석의 연극·뮤지컬 전용극장으로 2012년 재개관할 목표를 가지고 있다. 600∼700석 규모의 음악당 체임버홀은 명칭 사용권을 주는 대가로 기업의 지원을 받는 방식을 추진 중이다. 이 모든 공사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350억원. 기업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호의적이라고 한다. “대기업 중 4∼5군데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100년, 200년 후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돼 있을 예술공간에 기업 이름이 새겨지는 것도 해당 기업엔 큰 영광이 될 겁니다. 민간의 성의를 활용해 같이 윈윈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술의전당이 생긴 지 올해로 22년이다. 설립 초반엔 대담한 설계로 아시아권을 놀라게 했고 갈수록 규모만큼이나 내용도 훌륭해졌다. 김 사장은 “국내 문화예술계 소프타파워의 산실 역할을 해 왔다”며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는 심정으로 일한다”고 말한다.
3년 임기 내 꼭 해보고 싶은 일은 ‘명품 기획’과 ‘클래식 한류’ 바람을 일으키는 것. 미국의 링컨센터처첨 전 세계 유명 음악가라면 누구나 서고 싶어하는 무대로 예술의전당을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다. 이를 위해 각계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을 듣는 ‘싱크탱크 협의체’ 구성도 추진 중이다. 예술계 요구를 반영해 시설을 만들고 동시에 운영 노하우를 최고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클래식 한류’를 위해선 젊고 역량 있는 아티스트들에게 적극 무대를 제공할 계획이다. 또 관광상품과 연계해 외국 관광객이 꼭 들러보고 싶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게 그의 각오다. “세계 최고 복합아트센터로 키우고 싶어요. ‘예술의전당’이란 이름이 국민 모두에게 한없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김 사장은 외유내강형 추진력과 부드러운 처세로 유명하다. 이런 강점은 그의 삶의 배경과 무관치 않다. 가난 때문에 학업은 언감생심이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을 상대로 질긴 투쟁을 벌였고 결국 경남공고에 진학했다.
이때 적성이 기술이 아니라 사회과학 쪽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생의 방향이 달라졌다. 영남대 법대에 진학, 졸업과 함께 행정고시(23회)에 합격해 1979년 문공부 사무관으로 공직에 발을 디뎌 차관까지 지내다 지난해 20년 공직생활을 마쳤다. 지난해 12월 중순 이곳 예술의전당 12대 사장으로 옮겨왔다.
/jins@fnnews.com 최진숙기자
■김장실 사장은
△54세 △경남 남해 △영남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미국 하와이대 정치학 박사 △제23회 행정고시 △문화체육부 어문과장 △문화관광부 공보관 △국립중앙도서관 지원연수부장 △문화관광부 예술국장 △한국예술종합학교 사무국장 △국무조정실 교육문화심의관 △문화관광부 종무실장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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