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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인터뷰]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동아시아공동체 큰 틀 만들자”

▲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오른쪽)와 파이낸셜뉴스 곽인찬 논설실장이 일본 도쿄의 중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대담하고 있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일본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그가 이끌던 민주당은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 장기집권을 무너뜨렸다. 그 때 그는 일본판 제3의 길을 주창했고 여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 바탕에는 우애(友愛)가 있다. 그가 말하는 우애란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의 3대 정신 중 박애에 해당한다. 지나친 자유와 강요된 평등 사이의 균형점이 바로 우애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를 어떻게 평가할까. 복지 포퓰리즘에 대한 그의 생각은 뭘까. 파이낸셜뉴스는 창간 11주년을 맞아 도쿄 중의원 의원회관에서 하토야마 전 총리와 특별 인터뷰를 가졌다. 하토야마 전 총리의 동아시아 고문인 윤성준 본사 상무이사가 인터뷰에 배석했다.

(대담=곽인찬 논설실장)

의원회관 사무실을 들어서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함께 찍은 사진, 이승엽 선수로부터 받은 야구방망이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는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는 등 한국에 매우 우호적인 정치인이다. 그는 또한 부인 미유키 여사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류 팬으로 꼽힌다.

―한국에 친밀감을 갖게 된 계기는.

▲약 20년 전 정치 초년병 시절 대구에서 열린 사할린 잔류 한국인 관련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이산가족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한·일 양국의 신뢰가 충분치 않다는 것을 통감했다. 이것이 한국과 가까워지게 된 출발점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한국에 친밀감을 갖게 된 것은 한류 붐 때문이다.

―당신의 정치철학인 우애의 요체는 무엇인가.

▲자유는 중요하지만 시장만능주의 아래선 결국 강자만 살아남는다. 그러나 자유가 나쁘다고 국가가 통제하는 것 역시 문제다. 평등은 유지될지 모르지만 활력 있는 시장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이 공존하려면 우애가 필요하다. 우애는 개인의 자립, 타인과의 공생을 기초로 한다.

―우애의 연장선상에서 당신이 주창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와 공동통화가 과연 가능할까.

▲오래 전 유럽도 독일과 프랑스 간에 전쟁이 잦았다. '유럽통합의 아버지' 쿠덴호프 칼레르기가 1920년대 통합 이야기를 꺼냈을 때 사람들은 꿈 같은 일로 여겼다. 그러나 유럽통합은 현실이 됐으며 유로까지 나왔다. 동아시아 통합은 유럽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구상 자체가 중요하다. 서울·도쿄·베이징대학 간에 학점을 교환하는 캠퍼스 아시아 구상처럼 3국이 차근차근 협력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은 필요한가.

▲두 나라가 과거 역사를 뛰어넘어 문화·경제적으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이 이 지역 안정을 위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로 국가를 열어갈 필요가 있다. 초반의 우려를 떨쳐버리고 조금씩 열어나가면 윈윈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어떤 의미에서 두 나라는 민족적으로 매우 가까운 나라이며 좀 더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 경제가 왜 이토록 풀이 죽었는가. 활력을 되찾을 방안은 없는가.

▲최대 실패는 버블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버블을 없애려는 국가 정책도 잘못됐다. 버블을 없애려면 한국처럼 어려워도 한꺼번에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못했다. 경제가 활력을 찾으려면 디플레이션(저물가 속 저성장)을 해소하는 게 중요하다. 대지진을 계기로 부흥계획을 짜서 빨리 큰 청사진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모든 일본인이 자신감을 갖는 게 중요하다.

―고령화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가.

▲큰 테마다. 원래 장수는 좋은 것이다. 다만 장수사회를 유지하려면 일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야 한다. 소자화(少子化·저출산) 대책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일본 노인들은 자신들이 존재감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제 역할이 없어지지나 않았는지 걱정한다. 노인들은 손자들을 위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 노인복지도 우애사상에 근거해 접근해야 한다.

―고령화와 관련해 한국에 조언한다면.

▲일본은 연금대책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다. 노후에 안심하고 살려면 연금을 제대로 해야 한다. 한국은 역동성이 풍부한 나라지만 소자화 현상은 일본보다 심각하다고 들었다.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일본인들의 침착한 대응은 세계에 감명을 줬다. 침착성은 일본인의 DNA인가.

▲한신대지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큰 재해가 닥쳤을 때 침착성을 보이는 것은 동양적인 DNA라고 생각한다. 그 자체에 대해선 자긍심(프라이드)이 있지만 한편으론 정부가 거기에 안주해 신속한 대책을 펼치지 못한 것이 문제다.

―사고 이후 원전 여론은 어떻게 바뀌었나.

▲원전을 새로 짓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Fail Safe' 즉 원전이 실패하거나 고장나도 안전한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현실적으로 자원빈국인 일본은 원전을 포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Fail Safe' 개념으로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는 대책을 세워야 한다.

―2009년 일본 민주당이 대승한 배경은.

▲국민 대부분이 자민당 정치에 강한 불만을 품었다. 한마디로 관료한테 일임했던 정치가 국민에게 설득력을 잃었다. 관료천국이 됐지만 국민 생활은 좋지 않았다. 유권자들은 쓸데없는 돈의 남용에 분노했다. 그래서 우리는 관료 주도의 정치가 아니라 국민 의사를 중시하는 정치를 만들겠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그것이 국민의 평가를 받았다."

―2년이 지난 지금 민주당 지지율이 뚝 떨어졌는데.

▲총선에서 내걸었던 매니페스토(정책공약)가 유명무실해졌다. 아동수당·농어가소득보장 등이 충분하지 않았다. 여기에 간 나오토 총리의 소비세 발언이 있었다. 증세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재정이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소비세를 올려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이 증세가 어쩔 수 없다고 이해는 한다. 그러나 내가 물러나자마자 소비세 증세 발언을 했기 때문에 국민에게 불신감을 주었고 참의원 선거에서 대패하는 원인이 됐다. 이 바람에 우리가 약속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실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본의 열악한 재정 형편을 고려할 때 복지 공약은 포퓰리즘 아닌가.

▲아동수당은 한국의 저출산 탈피를 위해서도 가장 시급한 대책이다. 저출산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일 양국이 직면한 큰 과제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 정책은 정해진 예산을 가지고 어떻게 풀어가느냐의 문제다. 물론 이를 포퓰리즘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이들을 둔 가정을 지원하는 것이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아동수당은 매우 의미있는 정책이라고 지금도 확신한다.

하토야마는 총리 시절 유엔 연설에서 1990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을 2020년까지 25% 줄인다는 이른바 '하토야마 이니셔티브'를 발표했다. 이는 즉각 일본 재계의 반발을 불렀다.

―'하토야마 이니셔티브'를 발표한 배경은.

▲우애는 인간과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성립한다. 대학 시절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라는 책을 읽으면서 과학의 진보가 반드시 인간에게 플러스가 아님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인간이 사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생존을 위해 인간은 지구 환경에 대해 좀더 겸허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선진국인 일본이 선두를 치고 나가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를 국정 기조를 삼고 있다. 우애의 관점에서 이를 평가한다면.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추구하는 우애사회는 신뢰를 기초로 한다. 불공정하면 신뢰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공정한 사회는 우애사회로 가는 필수조건이다.

―한국에선 보수적인 한나라당까지 재계와 긴장관계에 있다. 일본은 어떤가.

▲(웃음) 원래 게이단렌(한국의 전경련)은 자민당을 지지해왔기 때문에 민주당으로 정권교체를 바라지 않았을 걸로 본다. 그러나 재계 안에도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기업이 꽤 있다. 예를 들면 재생에너지·태양광 등 새로운 분야의 기업들은 민주당이 더 좋다는 사람도 있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은.

▲일본엔 첨단 기술력을 갖춘 중소기업층이 두껍다. 한·일 FTA가 체결되면 한국에 불리할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시장이 더 열리면 일본 중기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서 배울 점은.

▲(웃음) 많지 않겠느냐. 국민이 강인하고 하고자 하는 의욕이 넘친다. 해외에 진출할 때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알린다. 일본에 비해 아이들한테 영어도 빨리 배우게 하고 많은 기업이 영어를 중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 기업들이 일본 경쟁사에 비해 더 많은 메시지를 (해외 기업들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도·교과서·위안부 등 한·일간 몇 가지 난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양국 관계가 양호한 때도 있었지만 한국인들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시대도 있었다. 역사적인 가시가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가시를 하루아침에 뺄 수는 없지만 우애정신을 바탕으로 서로 신뢰를 높여가면서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핵무기로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도 우애로 포용해야 하는가.

▲체제가 달라도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애정신이다. 북한이 외교의 장에서 주변국들과 신뢰를 쌓아가며 북한의 미래를 위해서도 핵정책을 포기하는 것이 바른 길임을 이해시켜야 한다. 북한에 강요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 일·북 관계는 그렇게까지 신뢰 관계가 구축돼 있지 않다. 일본으로선 납치 문제도 있다.

하토야마는 재임 중 오키나와의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 등을 놓고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미국을 언급할 때 매우 신중해 보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슈퍼파워 미국의 시대는 끝났는가.

▲미국 일극으로 세계의 안전보장과 경제를 결정하는 시대는 끝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G20이 그 증거다. 여러 나라가 협력해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그 공백을 중국이 채울 것으로 보는가.

▲나는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시진핑 부주석을 잘 알지만 이들이 슈퍼파워 중국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은 미국·아시아 각국과 협력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본의 역할은.

▲일본의 안전보장은 일·미 동맹이 기본이며 앞으로도 이것이 견지돼야 한다고 본다. 일·미 안보가 굳건하기 때문에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이 신뢰 속에서 안정을 지킬 수 있다. 미·중 양 대국 사이에서 일본과 한국은 서로 윈윈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재임 중 어떤 면에서 미국과 의견이 엇갈렸나.

▲두 가지다. 먼저 동아시아 공동체를 주장하자 미국은 일본이 아시아를 더 중시하는 게 아닌가 우려했다. 두번째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다. 동아시아 공동체는 미국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고 이해시켰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는 언제까지 일본 영토 안에 미군 기지가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졌다. 50년, 100년이 걸려도 좋으니 일본의 안보는 기본적으로 일본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양국은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현내 헤노코로 이전한다는 데 합의했다.

■정치철학 '우애'를 말하다

오늘의 하토야마를 있게 한 두 권의 책이 있다. 한 권은 1935년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겸 철학자인 리하르트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 칼레르기가 쓴 '전체주의 국가 대 인간'이란 책이다. 칼레르기는 "인간은 목적이며 수단이 아니다"라는 서두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스탈린 공산주의와 히틀러 나치즘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방종에 빠진 자본주의, 평등만을 추구하는 전체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도모하는 개념으로 우애(Fraternity)를 제시한다.

하토야마의 조부인 하토야마 이치로가 이 책을 번역했고 이후 우애는 '가훈'이 됐다. 하토야마는 주저없이 우애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쓰고 있다.

다른 한 권은 1972년 로마클럽이 펴낸 '성장의 한계'다. 도쿄대 공학부 재학 시절 이 책을 읽은 하토야마는 "머리를 때리는 충격을 받았다"고 밝혔다. 뒷날 하토야마는 유엔 기후회의에서 세계가 깜짝 놀랄 과감한 온실가스 감축을 약속한다. 그 바탕엔 자연에 대한 우애 사상이 깔려 있다.

하토야마의 우애 철학은 2009년 총선 직전 월간 '보이스(Voice)'지에 쓴 글에 잘 요약돼 있다. 그는 "현 시점에서 우애는 시장지상주의로부터 국민의 생활이나 안전을 지키는 정책으로 전환해 공생의 경제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우애는 정치의 방향을 판단하는 나침반이며 정책을 결정할 때의 판단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냉전 후 일본은 미국발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하의 시장원리주의에 계속 농락당했다"는 표현은 미국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하토야마,그는 누구인가

하토야마가 한국에서 정치를 했다면 한나라당 개혁파 또는 한나라당을 탈당한 민주당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유와 평등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그의 정치성향은 딱 중도파다.

그는 자민당의 빛바랜 보수성이 싫어 할아버지 하토야마 이치로가 만든 당을 뛰쳐나와 정권을 잡았다.

할아버지 이치로는 자민당 출신 첫 총리를 지낸 거물이었다. 점령국 미국은 이치로가 군국주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5년간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정계에 복귀해 어렵게 총리(1954∼1956년)가 된 이치로는 소련과 국교를 재개했다. 이런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하토야마가 총리 재임 중 미국과 각을 세운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치로 역시 1950년대 초반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을 창당한 적이 있으니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인 셈이다.

한국 정치인 중 하토야마와 비슷한 성향의 인물을 꼽으라면 정운찬 전 총리가 아닐까 싶다. 정 전 총리가 동반성장위원장으로 주장한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국내 보수 세력은 좌파적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나 시장만능주의의 부작용을 끊임없이 경계해온 하토야마라면 정 전 총리를 지지했을 것 같다. 중도 성향의 두 사람은 학자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하토야마는 일본 센슈대 교수를 거쳐 정계에 입문했다.

하토야마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을 꼽는다. 케네디가(家)는 미국 진보주의를 대표하는 정치명문이다. 하토야마 가문을 일본의 케네디가로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paulk@fnnews.com곽인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