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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칼럼] 의사들의 피터팬 신드롬

[곽인찬칼럼] 의사들의 피터팬 신드롬

런던 웨스트민스터 성당(Westminster Abbey)엔 영국 왕들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조국을 빛낸 위인들 역시 이곳에 묻힌다. 중세 영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초서, 과학자 뉴턴도 이곳에 묻혔다.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1809~1882년)도 그중 한명이다. 애비에 묻히는 것 자체가 본인은 물론 가문의 영광이다.

다윈은 1831년 탐험선 비글호(號)를 타고 세계 일주여행에 오른다. 남미 에콰도르 앞바다의 외딴섬 갈라파고스도 그때 다녀왔다. 5년에 걸친 탐사여행을 바탕으로 다윈은 진화론을 편다.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발언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맞먹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다윈의 진화론을 경제학에 적용하면 조지프 슘페터(1883~1950년)의 '창조적 파괴'가 된다.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를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파악했다. '파괴'라는 자극적인 용어가 암시하듯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꾸는 혁신은 종종 기득권층의 반발을 부른다.

16세기 영국의 발명가 윌리엄 리는 양말 짜는 편물기를 만들었다. 그는 기계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보여준 뒤 득의양양한 얼굴로 칭찬을 기다렸다. 웬걸, 여왕의 반응은 냉담했다. 특허도 거부했다. "그대의 발명품이 일거리를 빼앗아 백성들을 거지로 만들지 않을까 두렵소." 사실 백성은 핑계였다. 여왕은 실업자 증가가 정치불안으로 이어져 왕실의 권력마저 위태롭게 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프랑스 물리학자인 드니 파팽은 18세기 초 세계 최초의 증기선을 제작했다. 파팽은 이 배를 독일 풀다강에서 베저강까지 운행하려 했다. 그러자 두 강 사이의 운항을 독점하던 뱃사공 길드가 들고 일어났다. 파팽은 굴하지 않고 운행을 감행했다. 화가 치민 뱃사공들은 증기선에 올라 난동을 부리고 증기기관을 박살냈다. 파팽은 빈털터리로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에도 기술의 진보를 거부하는 기득권자들의 저항은 옹골차다. 한국에선 뜻밖에 의사들이 선봉에 섰다. 현오석 부총리는 의사들의 집단휴진을 '지대(地代) 추구(Rent Seeking)'의 전형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경제학자 고든 털록은 기득권자들이 제 이익을 지키려 정부·정치권을 상대로 로비 등 비생산적인 활동을 펴는 것을 지대추구행위라고 불렀다. 이런 행위는 자원배분을 왜곡해 경제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 또 다른 계층 사람들에겐 좌절감의 원인이 된다. 의사처럼 배타적 면허증을 가진 소수집단이 결사적으로 지대에 집착한다.

원격진료 거부가 좋은 예다. 요즘 정보기술(IT)산업은 초 단위로 진화한다. 기술 융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지만 의사들은 피터팬 신드롬에 갇혀 있다. 가진 것을 지키느라 우물 밖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길 거부한다. 21세기 한국 의사들은 수백년 전 기계파괴운동을 주도한 러다이트의 후예들이다. 뱃사공 길드는 파팽의 증기선을 망가뜨리는 데 성공했지만 기술 그 자체를 막진 못했다. 의사들이 아무리 재를 뿌려도 혁신 기술은 제 길을 가고야 만다.

기득권자들은 단기전 승부에 강한 듯 보이지만 장기전에선 맥없이 무너진다. 어느 누구도 기술혁명의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구글·애플은 스마트카로 전 세계 자동차산업을 뿌리째 뒤흔들고 있다. 아마존은 택배용 무인항공기 드론을 하늘에 띄웠다. 테슬라는 전기차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승리의 여신은 늘 혁신 편에 선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내놓자 한바탕 논쟁이 붙었다. 창조론 신봉자들은 진화론 진영을 향해 "그대의 할아버지쪽 조상이 원숭이인가 아니면 할머니쪽 조상이 원숭이인가"라고 조롱했다. 언론은 다윈을 원숭이로 그린 만평을 실었다. 하지만 진화론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술도 진화한다.
애플 아이폰, 삼성 갤럭시는 진화 단계를 숫자로 표시한다. 이 대열에 끼지 못하면 노키아 짝이 난다. 역사의 언덕에 서면 의사들의 저항은 뱃사공 길드처럼 한낱 에피소드로 끝날 공산이 크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