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선변호인의 하루(시간대별로 그래픽화하면 좋을 듯)
"사회적으로 아픈 사람들이잖아요. 피해의식도 있고요. 담당 사건이 하루에 10건 이상으로 많을 때는 사건기록 서류를 캐리어에 싣고 다녀야할 정도입니다. 법조인으로서의 초심·순수함이 없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정년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안정적이지도 않거든요."
지난 9일 오전 9시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국선전담법률사무소 '프로보노'에서 기자가 만난 김영운 변호사(36·사법연수원 39기·사진)는 10시부터 시작되는 오전 재판을 앞두고 변론정리에 한창이었다. 이곳에는 서울고등법원 소속 12명, 서울중앙지법 소속 31명 등 43명의 국선전담변호사가 활동 중이다. 올해로 5년째 국선전담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김 변호사는 서울고법의 형사사건 항소심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담당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많은 걸 물어보는 스타일이어서 불리한 진술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써야 한다"며 "돌발 상황에 대비해 예상 질문을 틈틈이 떠 올린다"고 말했다. 사물함 전면에는 재판일정이 빽빽히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사건기록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주제별 판례공보, 인권보고서, 사법연수원 실무수습기록, 학교폭력 예방교육사 등 관련 서적들로 인해 5㎡ 남짓한 사무실은 더 비좁아 보였다.
9시24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한 피고인의 아버지였다. 김 변호사는 "피해금액이 얼마인지 정해지지 않아서 사실상 합의하는 데 별 의미가 없다고 말씀드렸다. 재판에서 뵙겠다"며 전화를 끊었다.그는 9시40분에 족히 15kg은 돼 보이는 서류뭉치가 든 가방과 노란 백팩을 메고 법원으로 향했다.
■월평균 담당 사건 30건
오전 10시 20분 항소심 결심공판이 열리던 서울고법 302호 법정 안은 침묵이 흘렀다. 김 변호사가 변론을 맡은 피고인에게 판사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나요"라고 물었다. 60대 피고인 A씨는 최후변론 내내 옆자리에 앉은 김 변호사를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뇌경색을 앓고 있는 탓에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를 간파한 김 변호사는 "피고인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당시 피해자를 죽게한 게 죄가 된다는 인식이 없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지병으로 괴로워하는 아내의 부탁으로 아내를 살해하고 본인 역시 흉기로 자신의 손목을 생을 마감하려 했지만 때마침 찾아온 딸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진 A씨는 촉탁살인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곧이어 오전 11시, 같은 법정에서 김 변호사는 공갈·횡령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20대 B씨의 옆에 앉았다. B씨와의 인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어릴적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기를 보낸 B씨는 3년전 특수강도 혐의로 한 차례 기소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는데 그 당시 김 변호사가 국선변호를 맡았다.
"1년 6개월 전에 우연히 변론을 담당했던 피고인입니다. 부모님이 이혼하고 할머니 손에 자란 어린 시절이 사건의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범죄 가담정도도 비교적 낮고 피고인 아버지가 피해자들을 찾아가 일일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많이 반성하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구치소에서 나와 법무부 취업패키지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는 등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무언가 같이 하지 않으면 따돌림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김 변호사는 이날 오전에 4건, 오후에 2건의 재판을 들어갔다. 김 변호사가 맡는 사건은 한달 평균 30건이며 많을 때는 하루에만 16건의 재판에 들어갈 때도 있다. 그래서 이날은 비교적 여유로운 날이란다. 그는 보통 수요일과 금요일에 재판을 들어가고 나머지는 서울·수원·안양·남부 구치소를 돌아다니며 피고인을 접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피해자와 합의하는 것도 또 다른 주요 업무다. 이전에는 사건기록에 피해자 연락처가 기재됐지만 개인정보 보호가 강화되면서 재판부에 요청해야만 피해자와 연락이 가능해 일이 많아졌단다.
김 변호사는 "항소심이다보니 기각률이 60~70%로 높다"면서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절도 한 번에 왜 징역 3년, 6년형이 나오느냐'고 묻지만 최후변론 때 막상 떨려서 제대로 말 못하는 피고인이 많다. 왜 항소하는지 이야기를 쭉 들은 뒤 항소이유서를 쓴다"며 "다 만족시킬 순 없겠지만 '이정도 죄명으로는 이정도 형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만 설명해도 도움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대부분 경제적 약자를 대리하다 보니 김 변호사는 접견 시 피고인에게 기운을 불어줘야 하기 때문에 늘 활력을 유지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자신보다 어린 피고인을 만나면 처음에는 존댓말로 하다가 '이제부터 변호인이 아닌 누나, 언니'라며 '합의가 중요한게 아니고 정신차리고 출소해야 된다'는 쓴소리도 마다않는다. 그는 "가끔은 정신과 의사같다는 생각도 든다. 심리치료 책도 종종 보고 기력이 빠지는 '번아웃 증후군'에 걸리지 않게 틈틈이 여행을 간다"고 말했다.
■계약종료 후 일자리 고민 많아
종종 드라마 등을 통해 '국선변호사'라는 직업이 소개되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선 국선전담변호인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건을 맡는다. 재판부 임의로 형사사건이 배당된다. 법원별로 신청하고 사건 사임도 가능한 일반 국선변호인과의 차이점이다. 김 변호사는 "다른 변호사들은 금융처럼 멋져보이는 걸 하지만 우리는 기록이 복잡하거나 부담스러운 대형 사건, 살인 등 이른바 '골치아픈' 사건들을 맡는다"고 말했다.
좋은 옷을 입지 못하고 배낭메고 구치소에 찾아가는 게 그의 일상이다. 김 변호사는 5년째 수원구치소 법률상담을 하고 있다. 가끔 커피를 타주는 교도관이 있을 만큼 친분도 쌓았다. 월급은 국가에서 나오지만 개인사업자이다 보니 4대보험과 사무소 관리비를 스스로 내야 한다. 출산휴가나 퇴직금도 없다.
"취업정보 올라온 거 있나 확인도 해요." 의외적인 말이지만 국선전담변호사들 중 김 변호사와 같은 청년변호사들은 장래고민이 많다. 계약직 신분에 정년보장이 안 되는 데다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재계약 기회도 점차 줄고 있다.
국선전담변호사는 2년 임기 후에도 재위촉심사를 거쳐 2회까지 재위촉이 가능해 최장 6년간 활동할 수 있다. 다만 6년의 임기를 마친 후에는 다른 신규지원자들과 함께 경쟁을 벌여야 한다. 김 변호사는 "여자 형사변호사가 되면 '나만큼 형사사건을 다뤄본 사람이 없다'는 자신감이 있지만 형사사건 변호사는 전관 출신이 많아 불안감도 든다"며 "변호사는 영업력이 중요한데 과연 영업으로 연결될까 하는 고민도 한다"고 했다.
김 변호사는 계약이 만료되는 내년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최근 국선전담변호인 경쟁률이 높아진데다 로스쿨 연수생 등 지원자가 늘면서 '양보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기 때문이다. 그는 "2010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 곧바로 국선변호인에 지원했을 때 '거기 왜 가니'란 말을 들었다"며 "초반에는 면접에서 공익을 위해 일하려는 건지, 오래할 수 있는지 물었다면 지금은 마치 큰 혜택을 받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신아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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