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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칼럼] 비공유지의 비극

[차관칼럼] 비공유지의 비극

법경제학에서 종종 인용되는 말 중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commons)'이라는 말이 있다. 주인이 없는 재산은 과다 이용돼 황폐해진다는 것으로 시장경제의 기반인 소유권 부여의 중요성을 함축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비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anti- commons)'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1998년 마이클 헬러 교수의 논문에서 유래된 이 표현은 다수의 주인이 있는 재산인 경우 이들의 존재가 그 재산의 사용을 방해해 인류의 복리증진에 활발히 사용돼야 할 소중한 재산이 과소 이용되는 현상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최근 이 은유가 유행하는 이유는 표준필수특허, 즉 SEP(standard essential patent)라는 지식재산권 때문이다. PC나 스마트폰 같은 제품은 소비자 편의나 제조업체들의 자유로운 시장참여를 위해 당해 제품이나 이를 통해 제공되는 각종 서비스들의 접속가능성, 호환성 등을 보장할 필요가 있으며 이에 따라 표준기술을 정하게 된다. 표준기술은 주로 민간단체인 국제표준화기구 등에서 정하는데 SEP는 이러한 표준기술의 구현에 필수적인 특허를 말한다. 표준기술에 따라서는 수많은 SEP가 존재하고 따라서 표준기술을 구현하는 제품을 만드는 기업은 이들 다수의 SEP에 대한 특허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원가상승은 그 제품의 소비를 위축시켜 '비공유지의 비극'이 초래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기술발전 속도가 빠르고 특허 중첩이 심하게 이루어지는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국한된 현상일 수 있다. 또한 지식재산권 보호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수의 중첩된 SEP의 소유권자들이 길목 지키기를 하면서 과도한 로열티를 요구할 경우 소비자의 후생이 침해될 가능성도 크다. 이에 따라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논의가 제기되고 있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일부 업종에는 특허 보호기간을 단축하고 특허 심사를 보다 까다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 재산권 보호에 치중하는 법원의 보수적 태도가 변해야 한다는 주장, 국제표준화기구에서 SEP의 로열티 수준 합리화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독과점규제를 담당하는 경쟁당국이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기술시장에서 독점력을 갖는 SEP의 소유자가 이를 제품시장의 독점화를 위해 교묘하게 악용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행태에 대한 감시와 경쟁자를 배제하는 효과 분석에 보다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이러한 모든 주장이 논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만 시장에서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타나지 않고 '비공유지의 비극'이 가시화되면 독과점규제 강화 등 일부 주장이 현실화될 수 있다. 지금도 일부 이해관계가 큰 국가의 경쟁당국은 이러한 주장에 관심을 높이고 있는데 한국도 그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지식재산권의 부당한 행사에 대한 심사지침'을 개정해 특허권 남용 규제를 강화한 것은 이러한 높아진 관심을 반영한 것인데, 앞으로는 독점력 있는 특허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실제 사건을 찾아내 적극적으로 법집행을 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김학현 공정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