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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부자 3대를 못간다는데

정교한 승계 프로그램 짜야.. 독선경영의 결과 '땅콩 회항'

[이재훈 칼럼] 부자 3대를 못간다는데

2011년 3월의 일이었다. 한 스포츠신문 편집국의 항공담당 기자에게 박스 26개 분량의 신문 2400부가 착불 택배로 도착했다. 대한항공 기내지의 구독거절 통보였다. 이튿날 대한항공은 서울남부지방검찰청에 해당 기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언론구제절차는 생략됐다. 이 신문이 '대한항공의 저주, 광고 나오면 재앙'이라는 제목의 가십 기사를 게재한 데 대한 대한항공의 초강경 대응이었다.

일본, 미국, 중국, 호주, 뉴질랜드 등 대한항공이 광고를 찍은 5개국에서 공교롭게도 쓰나미, 원전폭발, 지진 등 대형 재난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기사 내용이었다. 문제는 대한항공 3세 경영인이 5편의 광고 제작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이 신문이 강조한 것. 이 부분에 오너 일가가 격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대한항공 관계자에게 "이게 언론 매체와 전쟁을 벌일 만한 사안인가, 왜 이런 무리를 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오너 일가가 관련된 문제에는 전혀 조언을 할 수 없는 분위기"라며 "우리는 그저 오너가 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고 토로했다. 그때 대한항공의 이른바 '황제경영'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오너 3세 3남매가 튀는 면이 있어 사내에서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대한항공 속사정을 조금이나마 아는 이들은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해 "터질 것이 터졌다"고 반응했다. 보호막 속에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고 경영능력을 미처 단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영 전면에 나선 오너 3세라면 언젠가 한번 이런 사고를 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흔히들 대한항공의 안이한 상황판단과 소극적 대응이 문제를 키웠다고 말한다. 첨단 서비스업을 하는 기업의 위기대응이 이렇게도 어설프냐며 혀를 찬다. 그러나 나는 지나치게 강한 오너십과 이에 길든 기업문화가 사태 수습을 꼬이게 했다고 본다.

사건의 당사자가 오너 3세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이었으면 이런 무리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직원들은 오너 3세에 대한 '결사옹위'에 나설 뿐 어느 누구도 사태의 심각성이나 여론의 향배, 사후조치에 대해 직언을 할 수 없지 않았겠나. 사건 발생 초기 조현아 전 부사장이 아닌 회사 명의의 사과문을 발표한 데다 그 내용도 사무장의 부적절한 처신을 탓하는 변명 일색이었던 것부터가 상식에 어긋났다. 조 전 부사장은 직위를 찔끔찔금 내려놓아 비난 여론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검찰 수사와 국토교통부 조사 과정에서 폭언, 협박, 폭행, 거짓말까지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모든 것을 오너 일가가 판단하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황제경영'이 부메랑이 돼 조 전 부사장 본인과 회사의 피해를 키웠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땅콩 회항' 사건은 일부 재벌이 '오너 리스크', 나아가 '후계자 리스크'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보여줬다. 요즘은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은 오너 3·4세가 없지 않지만 아직도 외국 유학 다녀온 뒤 회사에 간부로 입사하고 고속승진을 통해 어린 나이에 경영을 맡는 오너 후계자가 많다. 경영자로서 자질이나 소통능력, 리더십은 검증되지 않았다. 이 경우 독단과 불통의 리더십으로 흐를 위험이 크다.

전설의 투자자 워런 버핏은 경영권 대물림에 대해 "마치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장남들을 2020년 올림픽 대표선수로 뽑는 것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미국 유수의 기업들은 일찍이 오너는 지분 소유를 하고,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체제를 확립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기업은 오너가 예외 없이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 물론 오너경영체제는 과감·신속한 의사결정과 강력한 추진력이라는 장점이 있고, 이것이 한국 기업의 성공비결로 꼽히기도 한다. 그래서 승계가 더더욱 중요하다.

옛말에 '부자가 3대를 못 간다'고 했다. 창업보다 수성이 훨씬 어렵다는 얘기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업을 일으켜 세운 오너 1·2세에 비해 후계자의 능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재벌들이 정교한 승계 프로그램을 가동해야 할 이유다. 비뚤어진 가풍이나 기업문화가 일순간에 기업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