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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함부로 증세를 논하지 마라

'꼼수증세' 불신, 폭발 직전.. 감당할 수 없는 복지 줄여야

[이재훈 칼럼] 함부로 증세를 논하지 마라

연말정산을 둘러싼 파동으로 박근혜정부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정부가 소급해서 돌려줄 몇 천억원 세금이 문제가 아니다. 정부 조세정책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졌다. 박 대통령의 도그마인 '증세 없는 복지'는 한낱 '신기루'임이 확인됐다. 사실 이번 연말정산 결과가 '세금 폭탄'이라고 부를 만큼 월급쟁이들에게 치명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1년 반 전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는 세법개정안이 제시됐을 때 연말정산이 많이 팍팍해질 것이란 예상들을 했었다. 당시 정부는 "세금을 걷는다는 건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뽑는 것"(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란 궤변을 늘어놓았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고 세부담 증가 기준 소득을 연 350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대폭 상향하는 내용의 수정 세법개정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연말정산 결과 정부의 호언과 달리 연소득 5500만원 이하 계층에서도 세금을 토해내는 경우가 속출하자 직장인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정부가 계속해서 거짓말과 미봉책, 즉 '꼼수 증세'를 통해 서민의 주머니를 털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꼼수증세, 서민증세에 관해서는 정부도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싶다. 연초에 2000원이나 오른 담뱃값 때문에 서민의 가슴은 이미 큰 멍이 들어있었다. "증세가 아닌 금연정책에 따른 가격인상"이라는 게 정부의 주장이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담배야말로 소득 수준이 낮은 서민이 즐기는 기호품이며 담뱃세야말로 소득 역진적인 세금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야당도 지자체에 무상복지비 지원을 조건으로 2조8000억의 추가 세수를 노린 정부·여당과 야합해버렸다.

복지에 드는 돈은 늘어나는데 세금은 잘 안 걷힌다. 여기에 정부의 미봉적인 대응은 과세 형평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조세저항을 불렀다. '유리지갑'인 봉급생활자와 달리 자영업자의 소득파악률은 63%에 그친다. 정부가 고소득 전문직·자영업자에 대한 과세는 태만히 하면서 월급쟁이에게 손 벌린다는 피해의식이 번지고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데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출범 초기 '증세 없는 복지'를 위한 재원 마련 방안인 '공약가계부'를 발표했는데 이게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이다.

정부는 5년간 비과세·감면 정비로 18조원, 지하경제 양성화로 27조원, 세출구조조정으로 84조원 등을 확보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세출 집행은 오히려 불어나기만 하고 지하경제 양성화는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 비과세·감면 정비도 이번 연말정산에서 보듯 진전이 어렵다. 이러고서 국민에게 청구서를 내미니 누가 납득할 수 있겠나. 세율 인상이나 세목 신설이 아니니 증세가 아니라는 정부 주장은 허망하기만 하다.

이제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피하게 접어야 할 시점이다. 박 대통령은 2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수부진 속에 복지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지방교부세나 교육재정교부금 등 제도 개혁을 통한 재정확충을 주문했다. 여전히 '증세 없는 복지'에 집착하는 모습인데 상황은 그리 한가하지 않다. 정부의 선택은 증세를 하거나 복지를 줄이거나 둘 다 하는 것, 셋 중 하나다.

꼼수증세를 하느니 차라리 증세를 공론화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학자들이 주로 내놓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판국에 증세가 가능할까. 지금처럼 경기가 어려울 때 증세는 극약 처방과도 같다. 일본 아베정부가 소비세 인상을 추진하다가 침체의 덫에 걸린 것을 보지 않았나. 게다가 조세정책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 10명에 5, 6명은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을 더 낼 생각이 없다"고 반응하고 있다.

고소득층 소득세나 법인세를 올리면 된다고? 많은 국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이 경우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확충하기에 태부족이라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경제활성화에 역행한다는 점도 걸린다. 결국 남는 건 복지 축소뿐이다.
연말정산을 계기로 증세에 대한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번 드러났다. 정권 입장에서는 복지공약을 구조조정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 듯싶다. 그렇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