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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저가 담배가 어때서

"금연정책 포기" 비난 쏟아져.. 실수요자에도 발언권 줘야

[이재훈 칼럼] 저가 담배가 어때서

먼저 내 고백부터 해야겠다. 나는 34년간 쉬지 않고 하루 한 갑 이상 담배를 피운 진짜 골초였다. 자다가도 담배가 당겨서 일어나고 식사 중에도 담배를 물었던 사람이다. 내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이 맛있는 것을 왜 끊느냐고 우겨왔다. 그러던 내가 지난 연말 이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다. 아직도 흡연 욕구가 수시로 엄습하고 있지만 지난 두달간 잘도 참아냈다. 지인들은 "보기보다 독하네" "평생의 반려(담배)를 발로 찬 배신자"라는 반응이다.

짐작했겠지만 내 금연은 담뱃값 인상이 계기가 됐다. 한 갑에 4500원으로 80%나 오른 담뱃값이 부담스럽다거나 새삼 건강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국민 건강 증진'을 앞세우며 흡연자의 팔을 무지막지하게 비틀어 세수를 채우려는 정부의 행태가 실망스러웠다. 더욱이 정부·정치권의 '꼼수 증세'에 속수무책인 내 신세가 한탄스러웠다. 우리나라에서 흡연자는 공인된 '봉'이고 '죄인'이다. '봉' 노릇을 더 하지 않으려면 담배를 끊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었다.

피해의식이 내 금연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얘기다. 왜 안 그렇겠나. 담뱃값 4500원 중 74%인 3318원이 세금이다. 세금 비율이 과거 62%에서 엄청나게 높아졌다. 지방세를 좀 올려주고 국세인 개별소비세(갑당 594원)를 신설해 국고를 채운 것이다. 이쯤 되면 '세금을 피우는' 흡연자들의 의견도 좀 들어봐야하지 않겠나. 하지만 흡연자에게는 결코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설 연휴를 전후해 정치권에서 '저가 담배' 논쟁이 일었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서민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기존 담배보다 싼 담배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얼마후 새정치민주연합 전병헌 최고위원이 "손으로 말아피우는 봉초 담배에 한해 세금을 감면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즉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저가 담배 제안은 불쾌감과 배신감을 자극했다. 정부와 정치권은 담뱃값 인상에 대해 "금연정책이지 증세와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은 '꼼수증세' '서민증세'라는 반응이다. 그런데 이제와서 저가담배라니 노인과 저소득층 흡연자의 표를 구걸하기 위한 꼼수 아니냐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흡연자의 뒤통수를 한껏 후려치고 난 뒤 "화났냐? 내가 도와줄게"하며 달래는 모습이라니.

'담뱃값 인상이 결국 세수 때문임을 인정하는 꼴'이라는 게 저가 담배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논리다. 정책 일관성과 신뢰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이긴 한데 이게 흡연자 입장에서는 씁쓸하다. 비흡연자가 내세운 논리 같아서다. 마치 저가 담배 구상을 거둬들이면 담뱃값 인상이 정당화된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정부가 인정하든 말든 많은 사람은 담뱃값 인상의 주된 목적이 세수 확충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세수 증대 효과가 가장 크다는 2000원 인상안을 채택한 것, 담배에 개별소비세를 신설한 것 등 증거는 수두룩하다.

하루 한 갑 흡연자는 한달에 13만5000원 부담을 진다. 지난해에 비해 6만원의 추가 부담이다. 노인이나 저소득층에는 적지 않은 액수다. 군인들은 어떤가. 이병·일병은 이제 월급으로 담뱃값도 충당 못하는 지경이 됐다. 이들에게 "부담되면 끊으면 될 것 아니냐"고 윽박지를 수 있을까. 그럴거면 담뱃값을 왕창 더 올렸어야 하지 않았나. 과거에 노인에게 값싼 '솔' 담배를 팔고 장병들에게 면세담배를 공급했던 적이 있다. 취약계층에 이런 보완책을 쓰는 것이 그렇게도 억지일까.

여론이 들고 일어서자 당사자들은 "아이디어 차원일 뿐"이라며 황급히 진화했다.
저가담배 논쟁에서 소외된 흡연자들은 또 한번 가슴에 멍이 들 지경이다. "노인과 가난한 사람은 질 낮고 해로운 저가 담배를 피우고 빨리 죽으란 뜻이냐"는 비난의 소리에는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옛말이 실감난다. 세금 깎아주는 저가 담배라고 질까지 낮아야 한다는 법이 있나. 가만 있는 흡연자를 이렇게 사방에서 들쑤신다. 도와줄 생각이 없으면 내버려 두기나 하지.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