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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이주열의 변신

1%대 기준금리는 사상 처음.. '행동하는 한은' 기대감 커져

[곽인찬 칼럼] 이주열의 변신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정통 한은맨이다. 1977년 입행했으니 올해로 38년차다. 조사국장 등 주요 보직은 다 거쳤다. 부총재 마치고 2년 공백을 빼도 36년째다. 한은법은 한은의 존재이유를 물가안정에 둔다. 이 총재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얘기다. 그런 그가 디플레이션 파이터의 면모를 보였다. 기준금리는 사상 처음으로 1%대로 떨어졌다. 이 총재는 전임자 24명이 밟지 못한 땅에 발을 디뎠다. 최경환 부총리는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고 말했다. 이 총재 앞에도 길이 끊긴 지도가 놓여 있다.

그렇다고 아예 깜깜한 길은 아니다. 눈을 밖으로 돌리면 참고할 길이 보인다. 일본이 걸어간 길은 반면교사, 미국이 간 길은 롤 모델이다. 먼저 일본부터 보자. 1980년대 일본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에즈라 보겔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쓴 '재팬 애즈 넘버 원'이 나온 것도 이 즈음이다. 2차대전 패전의 멍에를 뒤집어 쓴 일본인들은 무한한 자긍심을 느꼈다. 1989년엔 극우파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가 모리타 아키오 소니 창업자 겸 회장과 함께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란 책을 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했던가. 이시하라가 목청을 높인 바로 그해부터 일본 경제는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새로 일본은행 총재가 된 미에노 야스시는 물가안정이라는 중앙은행 본연의 책무에 충실했다. 취임 시 그는 42년차 정통 일은맨이었다. 미에노는 1년 새 금리를 3.75%에서 6%까지 끌어올렸다.

미에노는 왜 금리인상을 서둘렀을까. 플라자합의(1985년) 이후 일본 재계와 정치권은 엔고 때문에 못 살겠다며 공공연히 금리인하를 요구했다. 전임 총재는 압력에 굴복했고 금리는 2.5%까지 떨어졌다. 저금리는 거품을 낳았다. 부동산과 주식은 천장을 모르고 치솟았다. 금융위기론의 세계적 석학인 찰스 킨들버거 교수(MIT대)는 "1980년대 말 무렵엔 세계적으로 고층빌딩을 지을 때 쓰이는 타워크레인의 절반 정도가 도쿄에 집결한 것 같았다"고 썼다('광기 패닉 붕괴-금융위기의 역사').

미에노는 부동산 대출의 끈도 조였다. 돈줄이 막히자 부동산 불패신화는 종말을 맞았다.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 은행들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소용 없었다. 미에노 임기 5년 간 닛케이 225지수는 반토막이 났다. 그는 거품을 끄느라 경제가 망가지는 걸 몰랐다.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 격이다. 미에노는 이임식에서 "중장기적 시각에서 인플레이션 없는 성장을 추구했다"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12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한 미에노에겐 일본 경제를 암흑기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란 불명예 딱지가 붙었다.

일본의 패착은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에게 교훈이 됐다. 금융위기가 터지자 버냉키는 곧바로 초저금리.양적완화 정책을 폈다. 일본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온탕.냉탕을 오갔다. 버냉키는 일관성을 잃지 않았다. 시장엔 포워드 가이던스, 곧 선제안내를 통해 중장기 정책 방향을 밝혔다. 시장은 버냉키를 믿고 따랐다.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세계 1위 경제대국의 위상에 손상을 입지 않았다. 반면 한때 세계 2위를 달리던 일본 경제는 3위로 처졌다. 그것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2위 중국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주열 총재는 취임 11개월 만에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꾸물거리던 한은이 드디어 움직인다는 인상을 깊이 심었다. 이 총재는 버냉키를 본받아야 한다. 버냉키야말로 양적완화·제로금리라는, 지도에 없는 길을 용감하게 헤쳐나갔다. 미국인들은 위기가 터지면 재무장관이 아니라 '경제대통령' 연준 의장을 본다. 1980년대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제 몫을 했다.
버냉키는 디플레이션 파이터로 치열하게 싸웠다. 중앙은행 총재의 능력은 위기 때 드러난다. 앞으론 우리 국민들도 위기 때 경제부총리가 아니라 한은 총재를 쳐다보는 날이 오면 좋겠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