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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증세, 노!

일본 소비세 올렸다 곤욕.. 아베 미워도 배울 건 배워야

[곽인찬 칼럼] 증세, 노!

증세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는 지난주 국회 연설에서 '가진 자가 더 많은 세금을 낸다는 원칙, 법인세도 성역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그의 연설은 야당으로부터 명연설 찬사를 들었다. 하루 뒤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도 "법인세와 소득세를 올리자"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정치판의 실세 두 사람이 의기투합했으니 머잖아 작품이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잠깐, 지금이 과연 세금을 올릴 때인가. 그래야 할 이유도 많고 그래선 안 될 이유도 많다. 양극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생각하면 세금을 더 걷는 게 맞다. 그 돈으로 복지를 늘려 좀 더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면 좀 좋은가.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이웃 일본을 보면 지금은 세금을 올릴 때가 아니라는 데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일본은 역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총대는 아베 신조 총리가 멨다. 정부는 재정을 쏟아부었다. 일본은행은 미국에 버금가는 양적완화에 나섰다. 올해 말까지 일은은 3조달러 넘는 돈을 시중에 풀 작정이다. 이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푼 돈(4조달러)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일본 경제 규모가 미국의 3분의 1 크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베 총리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은 총재의 과단성을 엿볼 수 있다. 그 덕에 일본 경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아베노믹스가 거저 온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거품이 꺼진 이래 일본 경제는 20년 암흑기를 거쳤다. 정책은 온탕과 냉탕을 오갔다. 그중에서도 최대 실책은 세금을 올린 거다. 1997년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렸다. 눈덩이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다. 소비세는 우리로 치면 부가가치세다. 결과는 참혹했다. 소비심리가 꺾이면서 되레 세수가 줄었고, 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카운터 펀치에 이은 KO 어퍼컷이다.

귀신에 씌기라도 한 걸까, 일본은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른다. 2012년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숙적 자민당과 손잡고 소비세 인상 법안을 밀어붙였다. 세율을 2014년 4월까지 5%에서 8%로, 2015년 10월까지 10%로 높인다는 내용이다. 2012년이면 한 해 전 대지진과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로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을 때다. 무슨 배짱으로 증세를 강행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베 총리도 법을 무시할 순 없었다. 예정대로 2014년 4월 소비세율을 8%로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일본 경제는 2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다. 보다 못한 아베는 2차 인상(10%)을 2016년으로 한 해 연기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조기총선을 실시해 유권자의 동의를 받았다. 내년에 진짜 10%로 올릴지는 그때 가봐야 안다.

경제정책엔 정답이 없다. 아무리 정교한 이론도 현실에선 어긋나기 일쑤다. 이럴 땐 실제 사례를 참고하는 게 상책이다. 벤 버냉키 전 연준 의장은 1930년대 대공황과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아베 총리는 버냉키의 양적완화를 모방했다. 유럽도 뒤늦게 돈 푸는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고 베끼는 중이다.

우리가 특히 눈여겨볼 곳은 일본이다. 싫든 좋든 한국은 일본의 뒤를 따를 공산이 크다. 지난 2012년 11월 미국 격월간지 '포린 폴리시'엔 '일본이 되려는가, 한국의 기적은 이제 끝?'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저자인 대니얼 앨트먼(뉴욕대 교수)은 '한국은 경제성장 엔진이 꺼진 일본의 길을 걷고 있다'고 썼다. 그러면서 "그나마 한국은 이웃(일본)의 실수를 보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20년 터널 속을 헤맨 끝에 활로를 찾았다. 불황 속 증세는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길이 빤히 보이는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건 어리석다. 그 대신 재정·통화정책은 좀 더 화끈하게 가면 좋겠다. 아무리 아베가 미워도 배울 건 배워야 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