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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성완종 블랙홀'에 갇혀 또다시 민생 걷어차지 말라

fn '성완종 파문' 긴급제언
의혹은 철저히 밝히되 총리 사퇴 요구는 근거 빈약
정부 현안 모두 집어삼켜 정치권 좀더 냉정해지길

[곽인찬 칼럼] '성완종 블랙홀'에 갇혀 또다시 민생 걷어차지 말라

'죽은 완종이 산 완구를 쫓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성공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주 남미행 전용기를 세워둔 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찾았다. 그리곤 "다녀와서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면 간첩이다. 이완구 총리의 자리는 간당간당한다.

이 총리의 3000만원 수수설에 박 대통령은 한숨부터 내쉬었을 게다. 박근혜정부의 총리 잔혹사는 여타 정권을 압도한다. 지금껏 모두 5명을 지명했지만 반타작도 못했다. 김용준·안대희·문창극은 청문회 문턱도 못 밟았다. 어렵게 국회 인준을 받은 이완구는 취임 두 달 만에 총리직은 물론 정치생명마저 위태롭다. 이러다 정홍원 전 총리가 컴백할지 모른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정말 웃을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총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다른 이는 제쳐두고 이 총리만 보자. 그는 손가락질 받을 짓을 했다. 후보자 시절엔 언론 외압 의혹을 불러일으켰고, 지금은 금품 수수 의혹에 휩싸여 있다. 해명은 거짓말 논란을 낳았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그는 분명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과 잘 아는 사이다. 솔직하지 못한 이 총리의 처신은 실망스럽다.

박 대통령은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했고,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꾸렸다. 전 국민의 눈이 서울 서초동에 쏠려 있다. 검찰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수사로 '이완구 의혹'을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39년 전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전격 구속했다. 미국 항공사 록히드에서 뇌물 5억엔을 받은 혐의다. 문무일 대전지검장이 이끄는 특수팀이 도쿄지검 특수부가 돼야 한다. 벌써부터 특검 얘기가 나도는 건 검찰에 수치다.

수사가 진행될 동안 이 총리는 자진해서 물러나야 할까. 그건 아니다.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는 국회의원들은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의원직을 수행한다. 무죄추정 원칙은 헌법(27조)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의원직을 잃은 성완종씨도 대법 판결(2014년 6월) 전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자기들은 삼세번 판결을 기다리면서 총리는 당장 물러나라고 다그치는 건 위선이다. 다만 이 총리는 보통 사람들처럼 검찰청에서 설렁탕 먹어가며 조사 받아야 한다. 작은 특혜라도 받는 순간 검찰 수사에 대한 신뢰는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사퇴를 요구하는 근거도 빈약하다. 성 전 회장은 제 구명운동을 벌이다 목숨을 끊었다. 청을 넣은 실력자 가운데 이 총리가 특히 모질게 굴었던 모양이다. 부정부패 척결 담화를 발표한 장본인이니 달리 어쩌겠는가. 앙심을 품은 성 전 회장이 이 총리를 좋게 말했을 리가 없다. 그는 죽기 전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 총리를 '사정대상 1호'로 찍었다. 세상 참 요지경이다. 청탁을 거절한 이들은 배신자 취급을 받고 사정을 봐주려던 이들은 의리파 대접을 받는다.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성 전 회장의 삶은 그리 모범적이지 못했다. 두 번 사면을 받았고 의원직도 잃었다. 그의 전방위 로비는 과거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을 연상시킨다. 그런 사람의 말을 야당은 철석같이 믿는 듯하다. 아니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정치적 이유에서다. 4·29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불거진 '성완종 리스트'는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다. 이번에 총리가 또 바뀌면 박근혜정부의 개혁 동력은 뚝 떨어진다. 공무원연금·노동 개혁은 물 건너갈 공산이 크다. 야당엔 꽃놀이패다.

원로 정치학자이자 학술원 회원인 진덕규는 "한국 정치사에는 '집요한 저류'가 있다"고 말한다('한국정치의 역사적 기원'). 수천년 한국 역사를 통틀어 통치는 지배세력 간의 극심한 권력투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게 진덕규의 통찰이다. 지배층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전투구를 벌이면 민생은 설 자리가 없다. '성완종 리스트'는 민생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다. 경제활성화 법안들도 공중에 붕 떠 있다. 여의도 국회에선 이런 일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수뢰 의혹이 모함인지 발뺌인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하지만 정치권은 수뢰를 기정사실화한 채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호들갑이다. 지배세력 간 권력투쟁이라는 집요한 저류가 다시 발동한 듯하다. 율곡 이이가 죽자 백성들은 눈물을 흘렸다. 율곡은 평생 안민(安民)을 추구한 실천적 정치가였다.
대한민국 국회는 입만 열면 민생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론 걸핏하면 민생을 걷어찬다. 이젠 그 위선을 걷어차야 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