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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헤파이스토스의 눈물

경쟁력 회복할 길은 요원해.. 제조업 쇠퇴로 망한 그리스

[이재훈 칼럼] 헤파이스토스의 눈물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 중 유난히 독특한 캐릭터는 불의 신, 대장간의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아닐까 한다. 제우스와 헤라의 장자이면서도 불구에다 못생긴 외모로 버림받은 헤파이스토스는 자수성가한 노력형 신이었다. 그는 금속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장인이었다. 트로이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그가 만들어준 갑옷과 검, 창으로 천하무적의 위용을 과시했다. 제우스의 번개, 헤르메스의 날개달린 모자, 아프로디테의 허리띠, 아가멤논의 지휘봉, 헬리오스의 전차, 에로스의 활과 화살 등이 그가 만든 '명품'들이다. 헤파이스토스는 뛰어난 재주 덕에 흉측한 몰골에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제조업 종사자들은 헤파이스토스를 극진히 숭배했다. 당시 첨단 제조업이었던 금속세공 분야의 기술 수준에 대한 그리스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원래 그리스는 이처럼 제조업 기반이 탄탄한 나라였다. 그런데 헤파이스토스의 후예들은 30여년 사이 이런 전통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다. 3차 구제금융을 받게 된 그리스의 침몰에 수만 가지 원인이 거론되고 있다. 좌파 정권의 복지 포퓰리즘과 도덕적 해이, 공공부문 비대화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원인은 왜곡된 경제구조라고 본다. 제조업의 몰락과 서비스업 일변도의 산업구조가 문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부자 나라였다. 1980년까지 50년간 그리스의 연평균 성장률은 5.2%에 달할 정도였다. 자동차, 가전, 선박, 화학, 섬유 등 여러 산업에서 괜찮은 제품을 생산해 수출도 하고 있었다. 1980년 그리스의 국가채무비율은 21.2%에 불과했다. 하지만 1981년 사회당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모든 게 뒤바뀌었다. 그해 그리스는 유럽경제공동체(EEC)에 가입했고 국가 간 보호장벽이 없어졌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과의 경쟁에서 그리스 제조업은 밀렸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가 다른 유럽국가와 비교우위에 있는 농업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고 제조업에는 여러 가지 규제를 도입했다. 철강, 선박, 금융 등은 국유화를 밀어붙였다.

2001년 유로존 편입은 그리스 제조업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다른 유럽국가들은 그리스에 물건을 마음껏 팔 수 있었다.저금리의 유럽 돈이 밀려들면서 그리스는 헤프게 소비를 했다. 제조업 강국 독일이 유로 통합의 혜택을 누리는 동안 그리스는 속수무책으로 수입의존도를 높였다. 각국은 수출에 비해 수입이 지나치게 늘어나면 환율조정을 통해 국제수지를 바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경우 자국통화가 없으니 환율정책을 쓸 수도 없었다. 그리스는 임금삭감을 통해 통화 평가절하 같은 효과를 기대했으나 제조업 기반이 워낙 약해 별소용이 없었다.

현재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중 제조업 비중은 5.7%에 그치고 있다. 90%가 관광·해운 등 서비스업이다. 이러니 올리브 열매를 수출하고 올리브 가공품은 오히려 수입하는 역설이 벌어진다. 세계 수준의 해운업을 갖고 있지만 선박은 모두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그리스에 대해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권하며 "드라크마(그리스 옛 화폐) 재도입과 평가절하를 통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수출할 제품 하나 변변히 없는 상황에서 그렉시트를 택하면 물가만 올라 그리스 국민의 고통만 커질 것이란 반론도 설득력이 있다.

그리스건 한국이건 강대국에 둘러싸인 소규모 개방경제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한국은 제조업에 강점이 있어 수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와 다르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일에 극복했던 것도 이 덕분이다. 그리스 사태가 주는 교훈은 개방경제에서 제조업과 수출이 망가지면 회복할 길이 요원하다는 사실이다.시름시름 앓고 있는 한국 제조업이 혁신의 고삐를 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