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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트랜스포머가 살아남는다

초대형 M&A로 PC 탈피한 델 사업재편은 필수 생존 전략
한국 기업은 강건너 불보듯

[이재훈 칼럼] 트랜스포머가 살아남는다

PC 조립업체 델의 창업자인 마이클 델은 한때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 버금가는 정보기술(IT) 분야 리더였다. 19세인 1984년 창업한 이후 유통 혁신을 통해 세계 1위 기업을 키웠던 그도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모바일 시대의 도래에 따른 PC산업 몰락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델은 2013년 사모펀드와 손잡고 회사 지분을 사들여 상장폐지한 후 잠행에 들어갔다. 그리고 2년여가 흐른 후 마침내 일을 냈다. 델은 지난 12일 데이터저장장치 업체인 EMC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670억달러(약 77조원)에 달하는 IT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이다.

EMC 인수 이후 델은 세계 1위 IT솔루션 기업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상장폐지 이후 델은 사업구조를 PC에서 서버.스토리지 등 기업시장(B2B)으로 빠르게 옮겼다. 지난해 델의 매출에서 데이터 저장 분야의 비중은 60%를 넘겼다. 대변신의 화룡점정이 EMC 인수였다.

델뿐만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들은 요즘 생존을 위한 변신, 즉 선제적 사업재편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통 제조업과 IT, 서비스업 분야에서 중국 등 신흥국의 도전이 거세다. 또한 기술발전이 가속되면서 신산업이 속속 등장하고 기존 산업의 흥망 사이클이 급격히 짧아지고 있다.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1935년 90년이었던 기업 평균수명이 1995년 22년으로 줄었고, 2015년 15년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장수기업인 듀폰과 제너럴일렉트릭(GE)은 끊임없이 신성장동력을 발굴해 경쟁력을 유지해온 사례다. 200년 역사의 듀폰은 1990년대 말 주력사업인 화학, 제약, 섬유가 침체되자 농.생명공학, 대체에너지를 집중적으로 키웠다. "변신을 시도하면 생존할 확률이 60~70%지만 변신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는다"는 찰스 할리데이 전 듀폰 최고경영자(CEO)의 일갈에서 그 비장함이 엿보인다. 2000년대 초 헬스케어.친환경에너지 분야를 신성장산업으로 육성했던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은 금융위기 이후 금융.미디어를 비핵심부문으로 보고 정리에 나섰다. NBC유니버설을 팔아치웠고 올 초에는 모든 금융사업을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멜트는 최근 "2020년까지 세계 10대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시름시름 앓던 일본 기업들도 과감한 사업재편과 구조조정, M&A로 활력을 되찾고 있다. 2009년 7800억엔의 적자를 냈던 히타치는 한국.중국에 밀리던 반도체, 디스플레이, PC, TV사업을 줄줄이 정리하고 환경, 에너지, 인프라 전문기업으로 변신해 사상 최대 흑자를 내고 있다. 카메라 업체인 캐논은 로봇.생명공학에 4000억엔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카메라 필름 사양화로 퇴출 위기에 몰렸던 후지필름은 액정표시장치(LCD) TV용 필름과 화장품, 의약품으로 사업재편에 성공했다.

글로벌 기업들은 전망이 좋지 않은 사업은 흑자를 내더라도 과감히 잘라내고 전망 좋은 사업은 M&A를 통해 진출하는 사업재편 전략을 쓰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톰슨로이터에 따르면 올 들어 9월 말까지 글로벌 M&A 규모가 3조4000억달러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이런 세계적 추세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듯하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2010년부터 올 9월까지 미국 구글의 M&A 실적은 154건으로 한국 삼성전자의 37건보다 4.1배 많았다. 2000년 시가총액 50위권의 비금융기업 중 2014년에도 50위권에 속한 기업은 30개에 달했다. 그중 업종이 변경된 기업은 5개뿐이었다. 사업재편에 소극적이란 뜻이다.

우리 기업들은 사업재편이라 하면 한계사업을 정리하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업은 신사업에 대한 투자 없이 진정한 변신을 이룰 수가 없다.
사업재편을 지원하는 '기업활력제고법(원샷법)'을 국회가 발목잡고 있다고 탓하기에 앞서 기업들이 먼저 절박함을 깨달아야 한다. 기업의 존망은 결국 자신에 달려 있다.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않는 기업이 먼저 죽게 되어 있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