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생활 파탄 책임이 있는 배우자(유책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범위를 확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이를 적용한 첫 사례가 나왔다. 껍데기만 남은 혼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해온 부부들의 이혼 청구가 늘어날지 주목된다.
서울가정법원 가사항소1부(민유숙 수석부장판사)는 남편 A씨가 부인을 상대로 낸 이혼 소송에서 A씨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파기하고 이혼을 허용했다고 1일 밝혔다.
45년 전 결혼한 두 사람은 1980년 협의 이혼했다. 3년 뒤 다시 혼인 신고를 했지만 A씨는 바로 다른 여성과 동거했다. 동거를 청산한 A씨는 다시 다른 여성과 동거를 시작해 혼외자를 낳았다. 동거녀 출산 직후 A씨는 이혼 소송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25년간 사실상 중혼(重婚) 상태로 산 A씨는 장남 결혼식 때 부인과 1차례 만났을 뿐 이후 만남도 연락도 없었다. 2013년 A씨는 다시 이혼 소송을 냈고 1심은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A씨는 이혼을 요구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2심은 대법원 판결을 인용해 "부부로서의 혼인생활이 이미 파탄에 이른 만큼 두 사람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25년간 별거하면서 혼인의 실체가 완전히 사라졌고 남편의 혼인파탄 책임도 이제는 경중을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희미해졌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남편이 그간 자녀들에게 수억원의 경제적 지원을 해왔으며 부인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 이혼을 허용해도 축출이혼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덧붙였다.
앞서 지난 9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13명 중 7명의 찬성으로 혼인 파탄에 책임이 있는 배우자가 이혼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현재의 유책주의를 유지했다.
다만 혼인 파탄의 책임을 상쇄할 정도로 상대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보호와 배려가 이뤄졌거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 배우자가 받은 정신적 고통 등이 약화돼 쌍방 책임의 경중을 엄밀히 따지는 것이 무의미한 경우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새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사실상 혼인이 파탄났다면 이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파탄주의'로까지 가는 것은 시기상조지만 현재보다는 유책배우자 이혼을 좀 더 폭넓게 허용해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조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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