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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고맙다 알사범!

'인간의 영역' 바둑 정복한 알파고 우리에게 AI혁명 현주소 보여줘
'대비하고 적응하라' 메시지 전해

[이재훈 칼럼] 고맙다 알사범!

이세돌 9단의 말마따나 원 없이 즐긴 일주일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할 것만 같았던 인간과 기계의 대결이 이처럼 심오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우리가 인공지능(AI)에 대한 공포를 과장한 공상과학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도 모른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이세돌과 구글의 AI 알파고 간 '세기의 대결'을 앞두고 "누가 이기든 인류의 승리"라고 했다. 다섯 차례 대국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의 말이 실감난다. 인간이 만든 기술 진화의 극치를 보여준 알파고나 승리를 향한 집념과 열정으로 인간의 품격을 보여준 이세돌이나 모두가 승자다.

알파고는 이번 대결을 통해 인간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경우의 수가 무한대인 바둑은 계산력뿐 아니라 직관과 통찰력, 창의력을 필요로 하는,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만이 할 수 있는 게임이라고 여겨졌다. 그런데 AI가 인간 바둑 최고수의 직관과 창의력을 넘어설 수 있음을 입증했다. 그것도 끊임없는 학습(딥러닝)에 의해서.

단지 알파고가 이세돌에게 4대 1의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알파고는 바둑의 통념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수들을 선보였다. 지엽적인 타산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하고 두터운 행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묘수.신수로 바둑계를 경악시켰다. "사람보다 더 사람같이 둔다" "전성기의 이창호 9단이 재림했다"는 극찬도 있었다.

당초 바둑계에서는 AI가 바둑의 두터움, 뒷맛, 기세(棋勢), 돌의 능률처럼 도저히 계산할 수 없는 영역을 이해할까 하는 의문이 많았다. 알파고가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기는 했다. 하지만 인간이 따라올 수 없는 계산력으로 이를 극복했다. 인간은 집 계산이 잘 안 되니 '두텁다'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 아니냐는 반성이 바둑계에서 나왔다. 알파고가 1국에서 터뜨린 통렬한 승부수(102수), 2국의 경이로운 '어깨짚기'(37수), 3국의 경쾌한 밭 전(田)자 행마(32수)는 바둑사에 남을 만한 '신의 한 수'였다.

바둑에서 인간이 갖고 있는 오만과 고정관념을 알파고가 깨버렸다. 프로기사들이 악수, 의문수라고 지적했던 알파고의 수들이 나중에 묘수로 판명됐다. 이세돌도 "알파고의 수법을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석(定石)과 바둑 격언이 다 맞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알파고 쇼크를 계기로 바둑계에서는 정석을 재점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알파고가 '알사범' '알10단'이란 애칭을 얻은 이유다.

알파고는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AI가 인간의 지적 능력마저 따라잡는다면 과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등을 숙고할 기회를 마련해줬다. 물론 인간 최고수의 패배는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떠올리게 했고 이 때문에 굴욕감, 허탈감, 무력감에 휩싸이는 AI 포비아(공포증)가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알파고가 던진 메시지는 "AI 시대가 코앞에 닥쳤으니 인간들은 속히 대비하라"는 것이다.

혹자는 구글이 20억원을 들여 1000억원의 홍보효과를 누렸다며 이번 이벤트의 최대 수혜자는 구글이고 한국은 그저 들러리만 섰을 뿐이라며 혀를 찬다. 내 생각은 반대다. 명색이 정보기술(IT) 강국이라는 한국이 AI 개발에는 열등생이다. 이번 이벤트를 통해 전 국민이 AI의 힘과 중요성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 기업도 정부도 늦게나마 대책을 강구하고 나섰다. 이런 모멘텀을 맞기란 쉽지가 않다.
이건 한국에 행운이고, 축복이다.

이제 인간은 AI 기술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인간과 AI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단계다. 알파고 쇼크 이후 새삼 바둑 붐이 일고 있다는 사실에서 공존의 희망을 보게 된다. 우리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알파고에 감사의 뜻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나.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