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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날림 공약' 실천할까 겁난다

잔치 끝나니 청구서 날아올 판.. 우리 경제에 큰 후유증 부를 것
총선 공약 구조조정 시급해

[이재훈 칼럼] '날림 공약' 실천할까 겁난다

극도의 정치혐오를 부른 4.13 총선이 끝났다. 유권자들은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후보와 정당을 놓고 차선 또는 차악의 선택을 하느라 고민깨나 했을 것이다. 이번 선거의 특징은 정책과 이슈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20대 국회가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고 막바지까지 막장공천 전쟁을 벌이느라 여야는 정책과제를 제대로 개발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구색 갖추기에 급급한 재탕.맹탕 공약, '아니면 말고' 식의 날림.뻥튀기 공약, 재원대책이 없는 뜬구름 공약이 판을 쳤다. 국가비전과 국정 운영방안, 경제회생 방안에 관한 논쟁은 아예 실종됐다. 유권자의 냉담한 반응에 수준 낮은 구호와 비방, 읍소와 사과, 협박과 공포 마케팅이 난무하는 진흙탕 선거전이 펼쳐질 수밖에 없었다.

잔치가 끝나면 청구서가 날아들게 마련이다. 돈 많이 드는 공약, 반시장적.반기업적 공약, 민생을 갉아먹는 공약들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총선 후 심각한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3당의 공약이행 비용이 새누리당 56조원, 더불어민주당 147조원, 국민의당 46조원 등 총 249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여야의 지역개발 공약에는 174조원이 드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런 공약을 이행하려다가는 나라 재정이 감당될 리가 없다. 이래서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지난 19대 총선은 이번 총선과 달리 굵직한 정책 이슈가 많았다. 재벌규제 강화 등 경제민주화와 무상급식.무상보육.무상의료 등 무상복지, 반값 등록금 등이 화두였다. 그러나 준비 안 된 무상보육.무상급식 정책은 재원부담 주체를 놓고 끊임없이 분란과 파동을 야기했다. 경제민주화 바람은 수많은 기업을 고통스럽게 했다. 이 때문에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지금의 경제난은 4년 전 선거 때의 포퓰리즘 공약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분석에 따르면 19대 국회의 공약 이행률은 51%에 그쳤다. 사회간접자본(SOC) 개발공약은 이행률이 고작 12%(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분석)였다. 국회의원들이 예산안 심사 때마다 '쪽지예산'이니 뭐니 해서 지역구 챙기기에 부산을 떨었지만 결과가 이 모양이다. 워낙 헛공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19대 국회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여야는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빠른 시일 안에 공약 다이어트, 아니 공약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앞서 엉터리 공약에 대한 반성문부터 써야 한다. 재원조달 계획이 빠진 억지 공약, 반(反)시장적.반기업적 공약, 국민 부담을 늘리는 공약은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 나는 일자리 공약을 첫손에 꼽는다. 여야의 공약대로라면 4년 내 일자리 1100만개가 생길 판이라니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기초연금 인상, 밭농업 직불금, 사병 급여 및 예비군 훈련수당 인상, 대학등록금 부담 완화 등 재원대책이 불명확한 공약도 마찬가지다.

공약 중에는 오히려 이행할까봐 겁나는 것들이 많다. 국민연금을 공공주택이나 SOC사업에 활용하겠다는 야당의 공약은 2200만 국민연금 가입자를 떨게 하고 있다. 청년고용할당제, 기업성과공유제, 납품단가연동제, 무역이득공유제 등은 기업들이 감당하기 어렵다. 기업 경영을 직접 건드리는 주제넘은 공약이 가장 큰 문제다. 광주에 삼성전자 전장사업을 유치하겠다는 더민주, 현대중공업의 구조조정이 없도록 하겠다는 새누리의 공약은 당장 철회돼야 마땅하다.

여야는 기존 공약의 거품을 싹 걷어낸 뒤 실천 가능한 공약은 이행 스케줄을 제시해야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누리당이 '한국판 양적완화'의 세부추진 계획을 밝힌 것은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의미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공적기구가 공약의 소요예산과 재원조달 방안을 검증하는 '공약검증제'를 도입할 때가 됐다. 호주·뉴질랜드가 그렇게 하고 있다. 이대로는 선거 후유증이 너무 크다.

ljhoon@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