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

[이재훈 칼럼] 기업 아닌 산업을 살려라

경쟁력 추락 심각한 한국 해운업 글로벌 시장 재편에서 밀려날 판
구조조정과 대형화 지원 병행을

[이재훈 칼럼] 기업 아닌 산업을 살려라

5대 취약업종 가운데 조선.해운이 먼저 구조조정 수술대에 올랐다. 현재로선 해운업의 사정이 가장 다급하다. 한진해운.현대상선 등 국적선사의 경쟁력이 회복 불능 상태로 추락한 상태에서 글로벌 해운업계 판도가 급격히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우리 해운업체들이 시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였다. 정부와 채권단, 기업이 구조조정에 태만했던 탓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 해운산업의 의미는 각별하다. 수출물량의 99.7%를 배로 실어나르는 나라에서 국적 선사가 없으면 운임결정력을 잃게 된다. 항만 등 연관산업 규모도 크다. 해운은 국가 비상사태 때 전시 군수물자를 수송한다 해서 육.해.공군에 이어 제4군이라고도 한다. 그런 해운업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8년 사이 급전직하했다. 흔히들 세계경제 침체로 인한 물동량 감소와 시세의 4~5배 되는 용선료(배 빌려쓰는 비용) 부담 때문이라고 한다. 양대 선사는 해운경기가 좋았던 2000년대 중후반에 비싼 값에 장기 용선 계약을 맺었다가 발목이 잡혔다. 그러나 왜 이렇게 됐는지 원인도 생각해봐야 한다.

양대 선사의 경영실패는 물론이고 정부.채권단의 잘못된 판단과 정책에도 책임이 있다.19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대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내로 끌어내리는 정책을 취했다. 업종 특성상 부채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는 해운업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해운업체들은 배를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의 배를 빌려 영업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지도 이 같은 정책 기조는 이어졌다. 현대상선의 지난해 매출 중 3분의 1을 용선료(1조9000억원)가 차지한 이유다.

금융위기 이후 우리 업체들이 배.터미널 등 재산을 되는 대로 팔아서 근근이 버티는 사이 글로벌 해운업체들은 정반대 방식으로 위기를 넘겼다. 덴마크의 머스크는 정부로부터 67억달러 (약 7조7000억원)를 지원받아 대형선박을 사들였고 중국 코스코는 157억달러의 지급보증을 받았다. 이들은 주력 컨테이너선을 1만7000~2만TEU(1TEU는 6m 컨테이너 1개)급 에코십으로 교체했다. 우리의 주력선은 여태 5000~8000TEU급에 머물러 있다. 효율에서 30~40% 차이가 난다.

선박 대형화와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온 글로벌 해운업체들은 최근 '치킨게임'에 돌입했다. 4개 해운동맹이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다. 우리 업체들은 새 해운동맹에 가입하지 못하면 그냥 도태된다. 정부와 업계에서는 그 시한을 6월로 보고 있다. 그때까지 구조조정의 큰 골격을 마무리 짓고 가입을 결판 내야 한다. 그래서 해운 구조조정은 속도가 생명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5월 중순까지 현대상선의 용선료 인하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선택은 법정관리뿐"이라고 말했다. 양대 선사 구조조정의 최대 관건이 용선료 인하 여부라는 점을 강조한 동시에 해외 선주들에게 인하에 협조하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그러나 두 업체 모두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로 가는 것은 해운동맹에서 퇴출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는 길이다. 용선료 협상 결과에 따라 둘 중 한 곳을 법정관리로 보내는 방안, 두 업체의 합병 또는 사업교환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해운 구조조정은 단순한 경영정상화가 아니라 미래 경쟁력 강화로 연결돼야 한다. 자구노력과 재무구조 개선이 필요하겠지만 이것이 업체의 생존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구조조정 이후 지원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글로벌 해운업체들의 사례가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정부가 12억달러 선박펀드를 통해 양대 선사에 대형선을 공급하겠다고 한 것은 의미가 크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부실기업 하나를 회생하는 식이 아니라 기업이 속한 산업이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기업이 아닌 산업을 살리는 구조조정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ljhoon@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