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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영 칼럼] 발권력은 동의받지 않은 세금

한은, 구조조정에 협력해야 하나
특혜 시비 견디기 어려울 것.. 개입 규모 최소한에 그쳐야

[염주영 칼럼] 발권력은 동의받지 않은 세금

정부가 쓰는 돈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나온다. 세금을 쓰려면 3단계의 감시망을 거쳐야 한다. 세법을 만들 때 한 번, 예산을 짤 때 또 한 번 국회의 동의를 받는다. 그리고 세금을 다 쓴 뒤에는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세금을 걷는 과정에서는 국민의 조세저항도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감시와 저항 없이 쓸 수 있는 돈이 있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이다. 발권력도 국민의 재산이지만 국회의 동의도, 국민의 저항도 받지 않는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이만큼 탐나는 재원이 없을 것이다. 도처에 돈 쓸 곳이 널려 있는데 유혹을 느끼는 건 당연지사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발권력은 '동의받지 않은 세금'이다. 정부가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국민의 재산을 끌어다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금은 엄격한 통제 하에 운용된다. 그럼에도 정부가 세금을 쌈짓돈처럼 헤프게 쓰거나 집행 과정에서 곳곳에 누수가 일어나 해마다 말썽을 빚는 것이 현실이다. 하물며 발권력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도덕적 해이와 특혜 등의 부작용을 유발할 위험이 세금보다 훨씬 크다. 1992년의 투신사 한은특융 지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가 주가를 떠받치기 위해 한은 발권력으로 저리 자금을 투신사에 빌려줘 주식을 사게 했다. 이는 정부가 국민의 재산을 동의 없이 주식 투자자들에게 나눠준 것과 마찬가지여서 특혜 시비를 불렀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위해 '한국판 양적완화'를 추진할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 주에는 정부와 한은이 만나 구조조정에 들어갈 자금을 얼마씩 분담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에 들어갔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필요한 역할을 적극 수행할 것"이라고 밝힌 점에 비춰보면 발권력을 대거 동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한 불은 우선 끄고 봐야 한다. 불이 나서 물을 퍼부어야 할 판인데 '내 물' '네 물' 가려가며 불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운.조선업의 구조조정은 우리 경제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이다. 정부가 적기 대응의 기회를 놓쳐서 호미로 막을 수 있는 것을 가래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됐다. 더 시간을 지체하면 손실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은 재정과 통화의 정책협력(폴리시 믹스)이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발권력 동원이 타당하려면 어떤 방법과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는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우선 이것은 양적완화가 아니다. 한은이 특정 분야(해운.조선업)에 구조조정 자금을 지원하면 지원액만큼을 다시 통안채로 묶기 때문에 양적으로 중립이다. 또한 통화정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산업정책이다. 산업정책은 정부가 세금으로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지금처럼 재정이 고갈돼 여유가 없다면 2순위는 빚을 내는 것이다. 한은의 발권력 동원은 그 다음 순서다. 발권력은 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여야 하기 때문이다.

한은은 발권력 동원의 전제로 '국민적 공감대'를 요구하고 있다. '국민적 공감대'는 결국 국회 동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한은이 이것을 요구하는 배경은 발권력을 특정분야에 지원하는 것이 특혜이며 그런 특혜 조치에 대한 정당성 확보의 차원일 것이다. 그러나 발권력 동원과 관련해 국회 동의의 선례를 남기는 것이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국회 동의가 가져올 긍정적 효과보다 정치권에 의한 발권력 남용의 폐해가 더 크지 않을까.

세금의 정당성은 국회의 동의로부터 나온다. 발권력의 정당성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물가와 금융의 안정을 통해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 있을 때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국민 모두를 위해 쓰일 때만 정당한 것이다. 그 책임은 온전히 한은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정부가 쓸 수 있는 돈은 세 가지다. 세금과 빚, 그리고 발권력이다. 가장 좋은 것은 정부가 필요한 만큼만 세금을 걷어 쓰는 것이다.
빚은 안 쓸수록 좋다. 발권력은 최악이다. 그 이유는 발권력이 '동의받지 않은 세금'이기 때문이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