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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폭풍전야' 영남권 신공항

발표 앞두고 PK·TK 갈등 격화.. 정치권이 득표 위해 악용한 탓
이러다 결정 또 물건너갈 수도

[이재훈 칼럼] '폭풍전야' 영남권 신공항

영남권 신공항(동남권 신공항)은 지역 갈등의 뇌관이다. 사전 타당성 검토용역 결과 발표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오자 영남지역이 또다시 끓어오르고 있다. 가덕도를 지지하는 부산과 밀양을 미는 대구.울산.경남.경북이 두동강 났다. 상황은 지역 갈등 때문에 사업을 백지화했던 5년 전 이명박(MB)정부 때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 최근 정치권이 여야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신공항 유치를 떠벌리는 바람에 갈등의 골은 과거보다 더 깊어진 느낌이다.

영남권 신공항 사업은 정치가 끼어들어 일이 꼬이게 한 대표적 사례다. 신공항은 당초 김해공항 포화에 대처하기 위한 부산시의 숙원사업으로 노무현정부 때 공론화됐다. 그런데 MB가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돌연 대구에서 "수도권에 대응한 동남권 허브공항이 필요하다"고 공약했다. 선거공약이 돼버린 것이다. 이후로 정치권은 선거 때마다 그저 표를 얻기 위해 신공항 유치를 내걸고 지역 민심을 헤집었다. 같은 여당(새누리당) 안에서도 대구.경북(TK) 지역 인사들은 밀양에, 부산.경남(PK) 지역 인사들은 가덕도에 유치하겠다는 모순된 언사를 일삼았다. 정치권의 부추김에 영남 지역민들은 신공항 입지 심사 결과를 믿지 않게 됐다.

'경제성 부족'을 이유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남권 신공항을 다시 살려낸 것도 정치권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부산 지역 여론이 심상치 않자 부산에서 "객관적 평가를 거쳐 가덕도가 최고의 입지라고 한다면 당연히 가덕도로 할 것"이라고 달랬다. 문재인 후보는 진작부터 가덕도를 밀었다. 예나 지금이나 휘발성 강한 이슈를 던지는 것이 최고의 득표전략이다. 당시 나는 '동남권 신공항 잔혹사'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박근혜.문재인 두 후보에게 질문을 던졌다. 눈앞의 한 표 때문에 공약을 제시했다가 감당 안 돼 거둬야 했던 MB의 전철을 밟지 않을 묘안이 있는가, 입지 선정 후 들끓을 지역여론을 어떻게 잠재우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지난해 1월 영남권 시.도지사 5명은 타당성 검토용역을 실시하고 유치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신사협정'을 맺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파리공항공단이 지난해 6월부터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 그러나 경쟁을 벌이지 않는다는 합의는 4.13 총선을 계기로 휴지조각이 돼버렸다. 정치인들이 신공항 문제를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박 실세로 통하는 새누리당 조원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대구에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고 있다"며 신공항 밀양 유치를 암시해 불을 질렀다. 발칵 뒤집힌 부산 지역 새누리당 후보들은 가덕도 유치 서명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부산에서 5석만 더민주에 주면 박근혜정부 임기가 끝나기 전에 신공항을 착공하겠다"며 유세했고 실제로 더민주는 부산에서 5석을 확보했다.

정치권이 이러니 해당 자치단체장들도 질세라 유치전에 나섰다. 가덕도 유치에 자리를 건 서병수 부산시장은 관련부처를 방문해 타협안을 제시했다 한다. 이에 경쟁지역 단체장들은 최근 부산시의 '약속 파기'를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지역 시민.경제 단체들은 잇따라 유치기원 행사를 열고 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신공항 문제로 친박과 비박, TK와 부산 간 내분이 확대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지만 일촉즉발의 긴장감은 어쩔 수 없다. 더민주에 신공항은 '꽃놀이 패'다. 가덕도가 선정되면 자기 공으로 돌릴 수 있고, 밀양이 선정되면 정권 책임론을 앞세워 부산 민심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신공항 입지 선정 결과에 따라 지역민심은 격하게 요동칠 것이다. 양쪽 지역이 결과에 쉽사리 승복할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내년 말 대선에서 PK와 TK의 표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부산에서는 "탈락할 경우 민란이 일어날 것"이란 흉흉한 얘기가 공공연히 나돈다. 이 지역을 텃밭으로 하고 있는 집권여당과 박근혜정부로선 엄청난 부담이다. 결국은 신공항 문제와 지역정서를 득표에 악용한 정치권의 자업자득이다. 영남 지역 민심을 두루 달래줄 '솔로몬의 지혜'는 정녕 없는가.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