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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입법만능주의의 망령

규제법안 쏟아내는 20대 국회
'경제민주화' 앞세워 기업 때리기.. 경제살리기는 안중에도 없어

[이재훈 칼럼] 입법만능주의의 망령

개원 두 달을 넘긴 20대 국회의 모습이 역대 최악이란 평가를 받은 19대 국회를 닮아가고 있다. 19대 국회의 실패요인은 과잉.졸속 입법과 낮은 생산성으로 요약된다. 19대 국회는 4년 동안 1만7822건의 법안을 발의해 이 중 42%인 7429건을 가결했다. 발의건수는 17대(7489년), 18대(1만3913건)보다 월등히 많았지만 가결률은 17대(57%), 18대(54%)보다 크게 낮았다. 특히 19대 국회 초반엔 법만 만들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입법만능주의가 만발했다.

19대 국회 출범 1년간 5300여건의 의원입법이 발의됐다. 1인당 18건꼴이었다. 일감몰아주기 규제법, 금산분리 강화법, 프랜차이즈법 등 기업을 규제하는 법안들이 줄줄이 통과됐다.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법, 임금피크제 도입을 배제한 정년 60세 연장법, 유독물질 유출을 강력히 제재하는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등이 기업을 휘청거리게 했다. 막무가내식 규제입법도 경제민주화를 앞세우면 그만이었다.

여소야대의 20대 국회에서 또다시 입법만능주의가 살아나고 있다. 특히 규제법안의 무더기 발의는 19대 때보다 정도가 심하다고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대 국회 두 달간 의원발의 법안을 분석한 결과 규제관련법안 597개 중 76.5%인 457개가 규제강화법안이었다. 전경련은 규제완화법안 비율에서 규제강화법안 비율을 뺀 수치인 규제온도가 -53.1도로 19대 때의 -43.9도보다도 낮았다고 지적했다. 장기 불황과 구조조정의 파장에 허덕이고 있는 기업들은 때아닌 규제리스크까지 맞닥뜨리면서 신음하고 있는 형국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규제입법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면 규제폭포 같은 상황이 된다"며 "입법 만능주의보다 자율적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말을 점잖게 했지만 좀 그만 볶아대고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해달라는 얘기다.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지금 너무 규제 쪽으로 많이 나가고 있다. 현실하고 동떨어진 규제가 나오면 기업 활동이 위축된다"고 우려했다. 발의된 규제법안들의 면면을 보면 '대기업은 곧 악(惡)'이라는 식의 반(反)기업적, 반시장적 인식이 확산돼 있다.

정원의 3~5%에 달하는 청년 신규채용을 의무화하는 청년고용촉진특별법의 경우 기업 업황이 나빠질 경우 이행이 어려워진다. 의무조항으로 인해 비청년층 고용을 줄이는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근로자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 이상으로 규정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의 경우 영세.중소기업 입장에서는 고용축소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 업무시간 외에 카톡을 하면 벌금을 물리도록 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기업 임직원의 최고임금을 최저임금의 30배로 제한하는 일명 '살찐 고양이법' 등 어이없는 법안이 부지기수다. 국회가 이렇게까지 기업활동에 시시콜콜 간섭할 수 있는 것일까.

야당은 22%인 법인세율을 25%로 올리는 법인세법 개정안도 발의했다. 다중대표소송제.집중투표제의 도입, 전자투표 의무화 등을 담은 상법개정안에 기업들은 비상이다. 이런 규제법안들은 야당이 지난 4.13총선에서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어찌 됐든 법안의 통과 가능성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성장과 경기침체가 고착되고 있는 이 시기에 이런 규제정책을 펴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세계 주요국들은 법인세를 내리고 친기업적 노동개혁을 단행하는 등 기업활동을 부추기기 위한 정책수단들을 쏟아내고 있다. 기업이 살아나야 경제도, 고용도 살아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기업들은 납작 엎드려 있다.
30대 그룹의 올 상반기 투자집행은 계획의 60%에도 못 미쳤다. 정부가 규제 혁파를 외치고, 국회는 신규규제의 생산에 열을 올리는 상황에서 기업의 투자의욕이 생길 리가 없다. 국회는 기업을 두드려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