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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최순실에 파묻힌 불쌍한 경제

과거 일본도 리더십 위기 속에 잘 나가던 경제가 끝없이 추락
한국판 '잃어버린 20년' 아른거려

[곽인찬 칼럼] 최순실에 파묻힌 불쌍한 경제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는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그의 집엔 비밀상자가 있었다. 판도라가 뚜껑을 여는 순간 통풍, 류머티즘, 복통 같은 온갖 질병과 질투, 원한, 복수 같은 재앙이 튀어나왔다. 화들짝 놀란 판도라가 뚜껑을 닫았을 땐 오직 희망만이 남았다.

최순실씨는 판도라의 상자다. 뚜껑을 열자 온갖 나쁜 것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교(邪敎) 이야기는 너무 음습해서 입에 담기도 거북하다. '굿판' 이야기는 소설로 믿고 싶다. 대기업들을 닦달해서 문화.스포츠재단을 세운 것은 약과다. 문화융성 예산을 주물렀다는 보도는, 사실이라면 입이 쩍 벌어질 일이다. 롯데처럼 약점 잡힌 사기업을 상대로 돈을 뜯는 것과 국민 세금을 쌈짓돈인 양 쓰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개인이 세금에 손을 대는 것이야말로 국기 문란이요, 국정 농단이다.

인간적으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을 이해한다.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꼿꼿이 앉은 채로 문세광의 총에 맞았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젖었다. 부모, 특히 어머니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진배없다. 5년 뒤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마저 측근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최태민은 그 틈을 노렸고, 20대의 박근혜는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최태민이 죽자 그의 딸 최순실이 인연을 이어갔다. 둘은 '소울메이트'처럼 지냈다.

이해하지만 두둔할 맘은 없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인이다. 적어도 4년 전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을 때 최순실과 연을 끊었어야 했다. 박 대통령이 주변 정리를 소홀히 한 것은 본인은 물론 국가에도 불행이다. 지금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친박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들은 최순실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오만방자하게 굴었다. 당보다 파벌 이익을 앞세웠다. 나라를 생각하는 맘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치 조선 말기 가문의 이익을 탐닉하던 세도정치를 보는 듯했다. 친박의 몰락은 역사의 응징이다. 새누리당은 명이 다했다. 이단 종교단체에서 당명을 따왔다는 소문이 파다한 마당에 어차피 새누리란 이름은 쓸 수 없게 됐다. 당을 해체한 뒤 거듭나야 한다.

경제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최순실 스캔들은 민감한 시기에 터졌다. 곧 인구절벽이 시작된다. 일하는 연령층(15~64세)이 줄면 그것이 곧 노인공화국이다. 이웃 일본 사례에서 보듯 고령화는 경제에 깊은 주름을 남긴다.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1990년대 일본 정치는 잦은 총리 교체로 몸살을 앓았다. 리더십은 실종됐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서 깨어난 게 아베노믹스다. 성패를 놓고 논란은 있지만 아베 총리의 지구력만은 인정해야 한다. 집권 자민당은 최근 당칙을 바꿔 총재 임기를 6년에서 9년으로 늘렸다. 아베 총리는 2021년까지 장기집권할 수 있는 길을 텄다.

최순실 게이트가 경제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 모른다. 행여 이번 사태가 한국판 '잃어버린 20년'의 시초가 될까 겁이 나서 하는 얘기다.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한쪽으로 쏠린 나머지 경제까지 내팽개치지 않으면 좋겠다. 어느 나라든 장기 정국혼란은 경제의 적이다. 정치권에서 거국중립내각 이야기가 나온다. 책임총리제가 현실적 대안이라는 말도 있다.
어느 경우든 총리가 내치, 대통령이 외교.안보를 맡는 그림이다. 국민의 열망인 협치가 지금보다 절실한 적이 없다. 여야 협치가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마지막 희망이길 희망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