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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기본소득은 헛된 꿈이다

기존 복지정책의 통폐합이 전제
안전망 취약한 한국선 시기상조
포퓰리즘 공약으로 전락할 우려

[이재훈 칼럼] 기본소득은 헛된 꿈이다

선거가 멀지 않았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한동안 잠잠했던 기본소득제가 다시 정치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야권에서 이재명.박원순.정운찬 등의 주자들이 도입을 주장했고,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때마침 '복지천국' 핀란드가 이달부터 2000명에게 매달 71만원씩 지급하는 기본소득제 실험에 들어갔다. 2012년 대선의 '경제민주화'처럼 2017년 대선에서 기본소득제가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커 보인다.

우려되는 것은 대권주자들이 기본소득제를 포퓰리즘 공약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제시한 내용에는 기본소득에 대한 오해 또는 의도적 왜곡.과장이 엿보인다. 마치 '공돈을 드립니다' 하는 현수막을 내건 꼴이다. 기본소득이란 국가가 잘살든 못살든 모든 국민에게 일정액의 생계비를 주는 무차별 복지제도를 말한다. 유토피아적 공상이거나 급진좌파자의 주장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기본소득은 논의의 역사가 꽤 긴 데다 최근에는 우파 경제학자나 기업인들이 논의를 주도해 왔다.

기본소득 아이디어의 기원은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라고 한다. 토머스 페인, 니콜라 드 콩도르세 같은 계몽주의자를 거쳐 20세기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붕괴를 막기 위해 사회적 약자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21세기 들어 논의에 불을 붙인 사람은 독일 자산가인 괴츠 베르너였다. 그는 2005년 각종 연금, 사회보조금 등 복지시책을 기본소득으로 대체하고 세금은 부가가치세로 단일화하자고 주장했다. 이것이 현재 선진국에서 논의되는 기본소득제의 특징이다. 즉 비효율적인 기존 복지정책을 통폐합해 행정절차에 드는 인력.비용을 감축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때문에 복지가 발달한 유럽 선진국에서 기본소득은 선택의 문제가 된다. 지난해 6월 스위스에서 있었던 월 300만원 기본소득에 대한 찬반투표는 77%의 압도적 반대로 부결됐다. 스위스 국민들은 엄청난 세금부담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사회안전망을 갖춘 스위스 국민들이 굳이 기존 복지제도를 포기하고 기본소득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다. 복지정책이 걸음마 수준인 우리나라는 사회안전망을 꾸준히 확충하는 게 우선이라는 게 정설이다.

요즘은 로봇.인공지능.자율주행차 등 일자리 파괴적 기술혁명의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기본소득이 논의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논의에 적극적인 이유다. 사람이 로봇에 일자리를 뺐기면 소비 기반이 무너지고 산업의 기반도 흔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4차 산업혁명으로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며 누가 기본소득 재원을 감당해야 할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모두들 망설이고 있다.

기본소득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재원을 어찌할 건가'와 '일하는 사람에게 불리한 제도'라는 것이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이사장인 강남훈 한신대 교수는 "전 국민에게 월 30만원을 지급할 경우 연 184조원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모든 세금을 올리고 세목을 신설하는 난리를 쳐도 감당하기 힘들다. 우리도 기본소득 문제를 논의할 때가 됐고 필요하면 실험도 해야 한다. 하지만 단지 돈 몇 푼 더 주는 것을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려 든다면 헛된 '공약(空約)'이라 할 수밖에 없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